겨울
황강록
눈 덮인 오후에 너에게 편지를 씁니다. 세상은 잠 속인 것처럼 고요합니다. 내 이야기를 하려니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고, 네 이야기를 하려니 할 말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얀 눈 위로 피가 뚝뚝 떨어지지만 아프거나 춥지 않습니다. 고통을 과장하지 않던 습관이 어느새 고통을 무시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반성이 됩니다. 만약 이 피가 나의 것이 아니라면 더더욱 그렇겠지요. 문득 편지를 쓴다 해도 너에게 가 닿을지 걱정이 됩니다. 바다에 눈물을 떨구고 싶지는 않습니다. 한 방울의 짠물이 바다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생각해보니 눈으로 뒤덮인 온통 하얀 침묵이 나로 하여금 너를 떠오르게 했고, 너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고 느끼게 만든 것 같습니다. 언제 너를 만났는지 네가 누군지도 온통 하얀···
이 풍경 속으로 그냥 걸어 들어가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너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눈 덮인 오후는
잊거나, 사라지는 것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전문(p. 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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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3-9월(405)호 <현대시가 선정한 이달의 시인> 에서
* 황강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지옥에서 뛰어놀다』『벤야민 스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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