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최재영
노을이 안마당까지 들어와 판을 벌인다
기왕지사 엎질러진 한 시절이라고
파도는 후렴구를 되풀이하며 울컥거리고
새 떼들 제 안의 깊이를 가늠하며
붉게 젖은 가슴으로 한 생을 횡단해 간다
어쩌면 당신에게 이르는 길은 끝없는 항해와 같아서
세상의 모든 저녁을 건너가야 할지도 모른다
노을이 툇마루에 걸터앉아
파도가 밀려드는 긴 눈썹 같은 해안선을
생의 내륙까지 밀어붙인다
소금기 가득한 자서전을 기록하는 내내
잠시 감았다 풀어지는 눈꺼풀의 기척만으로도
해안선은 밤새 뜨거울 것이다
새들의 노래를 끊임없이 분만하는 물거품
붉음이 아니고서는 노을을 거두어 돌아가고
각혈 같은 울음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까지
서로 눈물겨운 호흡을 주고받으리
온통 붉은 울음 범람하는 바닷가
그리하여 눈시울 붉힌 해안선을 읽어내느라
새들은 기어이 환상통을 뱉어내는 중이다
-전문-
해설> 한 문장: 작품 「붉은,」에서 깊어진 저녁노을과 붉게 젖은 가슴, 해안선의 물거품은 시간에 따라 잊히거나 지워져 가는 기억에도, 아직은 존속하는 풍광에 안도하는 시인을 떠올리게 된다. 나를 비롯한 만물은 변화하며 소멸을 향한다는 의식의 잠재에서 감각 인식에 따르는 현존의 스스로를 발견하기도 한다. 시인의 아쉬움이 무엇에 기인하는지는 알기 어렵지만 펼친 경계는 변화와 회귀임을 짐작할 수 있다. 노을과 파도는 늘 접힌다. 노을, 파도, 물거품의 모습이 감각에 중첩되며 지난 기억은 변하지 않은 듯 여겨지는 자연 풍경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얘기한 탈코드화(decoding)의 시작임으로 여겨진다. 해안선을 나는 새와 노을에서 건진 바닷가의 붉은 울음은 시인과의 경계가 맞닿은 부분이다. 아픔이라는 것도 환상통이라는 허구의 감각임을 알고 뱉어내고 날아가는 새에게서 아포리즘(aphorism)적 유의미를 추출해 본다.
시는 철학을 배경으로 조립되기도 하고, 경험을 토대로 경계에 맞닥뜨린 내적 사유를 제련하며, 나름 축적한 세계를 승화, 창출해 나가는 문학이다. 이런 전개는 주변 상관물과 왜곡된 기억에 상상력이 더해지며 언어 작업은 숙성하게 된다. (p. 시 60-61/ 론 144-145) (박용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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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통속이 붉다 한들』 에서/ 2023. 12. 1. <시산맥사> 펴냄
* 최재영/ 경기 안성 출생, 2005년 ⟪강원일보⟫ ⟪한라일보⟫ &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루파나레라』『꽃피는 한 시절을 허구라고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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