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동행 외 2편/ 함기석

검지 정숙자 2023. 12. 6. 01:22

 

    동행 외 2편

 

     함기석

 

 

  우산도 없이 빗길을 가는데

  누군가 다가와 같은 보폭으로 걸었다

  곁눈질로 보니 희망이다

 

  그도 온몸이 빗물에 젖어 떨고 있었지만

  처량해 보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깨우친 자의 얼굴처럼 고요했다

 

  어딜 가는 길이오?

  내 물음에 희망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이 진흙탕 빗길이 끝나는 곳에서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그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나야 하오

 

  빗줄기가 더욱 거세어졌다

  내리막 빗길 따라 코스모스가 따라 걸었다

  나는 뒤도 옆도 돌아보지 않고

  길이 끝나는 강가를 향해 계속 걸었다

      -전문(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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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모든 꽃은 예언이다

 

  불꽃들 다 지리라는

 

  침묵이 활짝 꽃피자

 

  모든 말이 시들었다

     -전문(p. 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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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실리

 

 

  시실리에 가 보셨나요?

  바람이 불고 들판 가득

  주홍빛 노을이 깔리는 저녁 무렵

  철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우산 속으로 뛰어드는 아이처럼

  그대 얼굴에 물방울을 뿌리며 예고 없이 나타나는 마을

  집들은 모두 금붕어 비늘로 덮여 있어

  햇빛이 비칠 때마다 아름답게 반짝이는 마을

  언덕에서 꽃들은 동요를 부르고

  나무들은 손에 손을 잡고 바람과 춤추고

  아이들과 염소들이 접시 타고 빗자루 타고

  마을 지붕 위로 날아다니는 마을

  공중엔 연못이 있고 숲이 있고

  하늘에서 하늘하늘 무지개 눈이 내리는 마을

  마을 입구엔 작은 술집이 있어요

  누군가 마시면 고통과 번민과 우울이

  일순간에 사라진다는 이상한 술을 팔아요

  그 신비한 술을 공짜로 팔아요

  시실리에 가 보셨나요?

  그대가 도착하는 순간 시간이

  하얗게 사라지는 마을 시실리時失里

  시실리에 가려면 낙엽을 타고 가야 합니다

      -전문(p. 110-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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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든 꽃은 예언이다』 에서/ 2023. 11. 13. <걷는사람> 펴냄

   * 함기석/ 충북 청주 출생, 1992년『작가세계』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 공원』『오렌지 기하학』『힐베르트고양이 제로』『디자인하우스 센텐스』『음시』, 동시집『숫자벌레』『아무래도 수상해』『수능 예언 문제집』, 시론집『고독한 대화』, 비평집『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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