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우리 시대의 시/ 함기석

검지 정숙자 2023. 12. 6. 01:00

 

    우리 시대의 시

 

     함기석

 

 

  시청광장에서 처형된 사형수다

  그녀의 눈동자에 고인 12월의 밤하늘이고

  목에 걸린 인조 목걸이다

 

  육교 계단에서 추위에 떠는 고아들

  녹슨 빗속을 최면 상태로 걸어가는 부랑자들이고

  젖은 불빛이다

 

  낫들이 활보하는 도시

  거리엔 웃음 없는 무녀의 피가 떠돌고, 우리의 얼굴은

  죽음이 화인火印으로 남긴 검은 판화들

 

  잠들면 종이가 자객처럼 내 눈을 베는 소리 들리고

  고열과 오한 사이에서 나의 펜은

  눈물을 앓는 새

     -전문-

 

  해설> 한 문장: 개인의 고달픈 삶과 또 그것이 반복되는 역사의 비극성에 주목하는 함기석 시인이 궁극적으로 도달하는 지점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행위로서의 시 쓰기이다. 그의 시세계가 무한한 운동성을 가진 진행형이라는 점은 이미 살펴보았다. 부연하자면 함기석의 시어는 언어적 차원에서 자의적 관계로 구조화된 기표와 기의의 양극단에서 진동하고 있으며, 그의 시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역사적 시간과 무한의 시간 두 차원에서 동시에 존재한다.

    (略)

  이제 이 작품을 다시 읽어본다면 "사형수"가, "12월의 밤하늘"과 "인조 목걸이", "고아들", "부랑자들" 그리고 "젖은 불빛"들 모두가 시인의 눈에 포착된 현실의 단면이자 상징들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 앞에 선 우리는 그저 눈을 감고 피하거나 또는 병들 수밖에 없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애써 감은 눈 위로도 "종이가 자객처럼 내 눈을 베"어 버리고, "고열과 오한 사이"를 오가는 순간은 결국 "나의 펜"이 그것을 대신 "앓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이다. 지나간 역사와, 그리고 역사로 만들어지는 오늘의 현실 앞에서 함기석은 이처럼 시를 받아들여 시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끊임없이 자각하고 있는 것이다. (p. 시 27/ 론 129-130 () 130-131) (남승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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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모든 꽃은 예언이다』 에서/ 2023. 11. 13. <걷는사람> 펴냄

   * 함기석/ 충북 청주 출생, 1992년『작가세계』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국어선생은 달팽이』『착란의 돌』『뽈랑 공원』『오렌지 기하학』『힐베르트고양이 제로』『디자인하우스 센텐스』『음시』, 동시집『숫자벌레』『아무래도 수상해』『수능 예언 문제집』, 시론집『고독한 대화』, 비평집『21세기 한국시의 지형도』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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