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화
최백규
그날 이후 아버지는 터진 폭죽 같았다 여름 축제의 끝 무렵처럼 식어가고 있었다 먼 산을 바라보는 뒷모습으로 일몰이 스며들었다
철 지난 꽃들이 수런대는 사이 사람이 더는 사람이 아니게 되어도 괜찮은 걸까
올해 들어 뒤꼍의 철쭉마저 일찍 졌다는데 흐드러지지도 못하고 바닥만 뒹굴겠구나 어머니는 상한 자두를 잘라내고 있었다 나는 고장난 손목시계를 붙들고 머뭇거렸다
어머니, 화분이 또 죽었어요 아무래도 저만 계속 실패하는 것 같아요 아니란다 얘야, 너는 최선을 다했단다 힘들면 이번 생에서 그만둬도 괜찮아
그런데 여름 과일은 왜 이리도 쉽게 무를까 언제쯤 다른 집들과 화장실을 같이 쓰지 않는 집에 누울 수 있을까 언덕 위 성당 종소리를 따라 나도 어딘가로 희미해지는 듯했다 어느새 아버지의 숨소리도 잦아들었지만
빛바랜 꿈속에서도 아버지가 피우는 불꽃은 높고 선연하였다
아버지, 그래도 무언가 이상해요 이제 다 지난 일이라는데 그만 주무시고 일어나서 무슨 말씀이라도 해주세요 아버지, 아버지······
-전문(p. 317)
#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이 계절의 과일처럼 달콤한 향기일 수도 있고 계절이 지나간 뒤 잔잔한 여운을 주는 한 바구니의 문장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시인이 시에 바라는 것이 무엇일까? 그는 무엇을 망설이는가? 『포지션』에서는 첫 시집을 출간한 시인을 모시고 몇 개의 키워드를 통해 여전히 작품을 고민하는 시인의 현장감 있는 목소리를 들어본다. (편집부) / 블로그 註 '지담' Part는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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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지션』 2022-여름(38)호 <POSITION · 10/ 이 계절의 첫/ 자선시> 에서
* 최백규/ 2014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첫 시집『네가 울어서 꽃은 진다』, 동인 시집『한 줄도 너를 잊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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