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과 몽당비 외 1편
휘민
해거리하는 늙은 감나무에 눈송이 내려앉으면 온세상 잘 타 놓은 햇솜처럼 폭신폭신했지. 장독대의 금간 항아리들도 목련 꽃송이처럼 활짝 피어서 온밤 내 뒤뜰이 봄 언덕처럼 환했네.
아침 되어 아버지는 눈을 쓸고 나는 아버지보다 커다란 눈사람을 만들기로 했네. 그러나 너무 깨끗한 눈은 잘 뭉쳐지지 않았지. 내 안의 어둠과 아집, 치기를 밀어 넣은 뒤에야 몸통 하나 내주던 겨울. 내가 밟고 지나온 발자국마저 거두어 머리 올리고 아버지의 싸리비 꺾어 눈도 붙여 주었네.
오늘 밤 또 눈이 내리고 고향집 처마 밑에도 사박사박 하얀 어둠 쌓일 것이네. 밤새 조바심하다 새벽녘에 첫눈을 밟는 아이 이제는 없지만 아침 연기 흩어져 섣달 하늘에 스밀 때쯤 들릴 것이네. 싸르락싸르락 아버지의 비질 소리. 그 소리 놓칠까 봐 창문이 훤해도 눈을 못 뜨겠네. 현관 밖에 몽당비 한 자루 서 있을까 봐 눈 그치고 날 저물어도 문을 못 열겠네.
-전문(p. 74-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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첼로
방 안 깊숙이 달빛이 걸어 들어와 있었다
죽은 사람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굳어 있던 몸에서 새살이 돋아나고
하품을 하며 깨어난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우는 내가 있었다
누가 나의 잠 귀퉁이를 흔들어 당신에게 데려갔을까
암실 속으로 들어와 닻을 내린 한 줄기 빛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나는 한밤중에
무릎을 껴안고 중력을 달래는 사람이 된다
짐승 같은 잠 속에 빠져
두 눈을 잃어버린 당신은 달의 뒤편에서
사나운 어둠을 길들이고 있는 사람
홀로 노를 저어 망망대해를 건너가려는 사람
활이 지나간 자리였을까
달빛에 베인 상처였을까
나는 한동안 당신을 생각하느라 어두워진 갈비뼈를 더듬는다
울림통이 된 몸에서 더 이상 새어 나가지 않도록
가만가만 창가로 다가가 커튼 자락을 여민다
그러나 살갗을 파고드는 먹물처럼
그림자를 지워도 사라지지 않을 마음의 얼굴
온종일 달아올랐던 바닥이 식는지
비틀린 관절을 꺾으며 집이 우는 소리를 낸다
-전문(p. 12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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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중력을 달래는 사람』 에서/ 2023. 11. 20. <걷는사람> 펴냄
* 휘민/ 충북 청원 출생, 2001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 2011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등단, 시집『생일 꽃바구니』『온전히 나일 수도 당신일 수도』, 동시집『기린을 만났어』, 동화집『할머니는 축구 선수』, 그림책『라 벨라 치따』등, <시힘> 동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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