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나무
송연숙
곱사등처럼 웅크린 시간을 편다
추곡약수터 가는 길
살금살금 다가가 두 눈을 가리고
누구게, 하고 물으면
화들짝 놀라 향기를 쏟아놓던 노란 스웨터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생강나무꽃처럼
그리움의 팻말을 건 사람 걸어 나온다
꼬리를 치켜세우며 다가오는 고양이처럼 선명하다
무릎을 접고 앉아 약수를 퍼 올린다
그만큼의 속도와 양으로
줄지도 넘치지도 않고 고이는 사람
무릎처럼 깨진 시간의 빈자리를 호호 불어준다
만병통치 약손으로 아픈 배를 슬슬 문질러
온몸 환하게 불 켜 주던 사람
한 사람이 한 사람의 우주이고 집이었다는 걸
늦봄처럼 깨닫는다
생강나무 손을 잡고 약수터에 나들이 온 봄
나뭇잎에 햇살 비벼 널며 파랗게 물오른다
이 소박한 나들이에도
꽃잎 웃음 터트리며 즐거우하던 엄마
서른아홉에서 멈춰 선 그녀는
사진 속 봄꽃처럼 시들지 않는다
물방울이 스며 약수터 바위 색을 붉게 바꿔 놓았다
간절히 불러도 소실점처럼 사라지는 이름
알싸하게 쏘는 약수가 빈속을 훑고 내려간다
-전문-
해설>한 문장: 그런데 이 시의 제목은 '생강나무'가 아니라 '생각나무'이다. 게다가 여기에 등장하는 '생각나무'는 실제 존재하는 식물이 아니라 시인이 만든 가상의 나무인 듯하다. 왜 '생강나무'가 아니라 '생각나무'일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이 시를 읽으면서 집중해야 할 부분이다. 시인은 어느 봄날 약수터를 방문했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곱사등처럼 웅크린 시간을 편다"라는 진술은 봄을 맞이하여 약동하는 자연의 생명력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봄이면 지천으로 피는 생강나무꽃처럼/ 그리움의 팻말을 건 사람 걸어 나온다"라는 진술처럼 그것은 이질적인 시간의 출현을 표현한 것으로 읽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시인은 약수터 가는 길에 생강나무꽃이 지천으로 피어 있는 장면을 보고 그것들이 '노란 스웨터'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적 경험은 곧바로 그녀를 "그리움의 팻말을 건 사람"이 걸어 나오는 낯선 시간으로 데려갔다. 약수터 가는 길에서 노랗게 핀 생강나무꽃과 마주하는 장면이 일상, 즉 '보행'에 해당한다면, 그 우연한 마주침을 통해 낯선 시간 속으로 들어가는 경험은 비일상, 즉 '춤'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았다. 이때 "곱사등처럼 웅크린 시간"이 펴진다는 것은 지금까지 애써 눌러놓았던 그리움의 감정이 불시에 솟아오른다는 의미일 것이다. 시인은 '생강나무꽃'이 자신을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과 추억의 시간으로 이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그것을 '생각나무'라고 표현한 것이다. 요컨대 이 그리움이라는 감정의 도래가 바로 제목에 등장하는 '생각'의 정체이다. (p. 시 18-19/ 론 127-128) (고봉준/ 문학평론가 · 경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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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봄의 건축가』 에서/ 2023. 10. 20. <한국문연> 펴냄
* 송연숙/ 강원 춘천 출생, 2016년 『시와표현』 신인상 수상 & 2019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측백나무 울타리』『사람들은 해변에 와서 발자국을 남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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