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분향리 석불입상/ 조선의

검지 정숙자 2023. 11. 29. 00:25

 

    분향리 석불입상

 

     조선의

 

 

  탑신에 이끼가 돋아났다

 

  뜬 눈으로 천년을 꼿꼿이 선

  석불 내부는 언제나 위태로웠다

 

  나는 지금 없는 아버지와 동거 중이다

 

  쓸모없는 돌로 무엇을 하려는지

  세월을 되질하듯 어둠을 캐는 아버지는

  더운 내 가슴 한가운데로 불면을 흘려보냈다

 

  수 세기에 걸쳐 깊어진 석불은

  상처 입은 마음을 살피는 이 땅의 은자

  가까워지는 걸음으로 속세를 향해 귀를 세우고 있다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의 자학에서 빠져나왔으나

  마음의 빈터마다 눈먼 남루가 극성을 부렸다

 

  머리 꼭대기에 불을 밝힌 아버지는

  타는 해를 삼켜버린 돌덩어리, 돌덩어리

 

  숨 막히는 불안을 떨쳐내고 눈을 뜨니

  몸 안으로 구름 같은 나비 떼가 날아들었다

 

  생존의 늪을 건너는 참회의 눈물 한 방울로

  아버지는 꺼지지 않는 목숨에 닿았다

      -전문-

 

  * 분향리 석불입상: 담양군 가사문학면 분향리. 유형문화재 제44호.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이 석불은 얼굴은 미소를 띠고 있고 둥글며 풍만하나 도식화의 경향도 보인다. 5도 정도 비스듬히 서쪽을 향하고 있는 모양이 특이하다.

 

  해설> 한 문장: 이 시집은 담양을 사랑하는 조선의 시인이 몸소 시가 된 담양의 헌사가 아닐까. 시집의 시편들에는 모두 주석이 달려 있다. 대개 담양의 명물들에 대한 주석이다. 담양을 잘 모르는 독자들은 이 시편들을 통해 담양의 다양한 명물들을 알게 될 것이다. 필자도 이 시집을 읽고 담양엔 정말 보물 같은 역사 유물이 많고 오래 보존된 자연물 역시 많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물론 이 시집의 시들이 이러한 명물들에게만 바쳐진 것은 아니다. 조선의 시인은 담양 곳곳을 돌아다닌다. 그곳에서 만난 나무니, 꽃이니, 정자니, 절터니, 그 모두가 그의 시작詩作을 형성시킨다. 물론 그가 담양을 가이드하기 위해 시를 쓰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담양의 몸을 이루는 여러 장소와 사물들이 그를 시적으로 변용시키는 현장을 보여주고자 한다. 그 사물들과 장소들은 조선의 시인을 시인으로 존재케 하는 마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그것들로부터 자신의 기억이나 마음을 끌어올리는 특별한 기운을 느낀다.

  가령 시집을 열면 만나게 되는 첫 시 「분향리 석불입상」에서 시인은 석불로부터 '아버지'를 떠올린다. 주석에 따르면 '분향리 석불입상'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그가 이 오래된 석불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석불은 "상처 입은 마음을 살피는 이 땅의 은자"이고, 시인은 석불 앞에서 그의 아픈 기억   아버지에 대한   을 떠올리는 것이다. 시에 따르면 "속수무책 받아들여야 했던/ 아버지의 자학에서 빠져나왔으나/ 마음의 빈터마다 눈먼 남루가 극성을 부렸다"는 것.

  아버지는 지금 없지만 여전히 시인과 동거 중이다. 아버지는 시인의 "머리 꼭대기에 불을 밝"히고 태양을 삼킨 돌덩어리로 그에게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 석불의 미소는 시인의 마음을 다스려주고, 아버지와 화해로 이끈다. "몸 안으로 구름 같은 나비 떼가 날아"드는 것은 치유와 화해를 상징한다. (p. 시 18-19/ 론 107-109) (이성혁/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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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담양, 인향만리 죽향만리』 에서/ 2023. 10. 31. <상상인> 펴냄

   * 조선의/ 2012년 ⟪농민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당신, 반칙이야』『어쩌면 쓸라린 날은 꽃피는 동안이다』『빛을 소환하다』『돌이라는 새』『꽃, 향기의 밀서』『꽃으로 오는 소리』『반대편으로 창문 열기』『아직 도달하지 않은 입의 문장』, 저서 『생명의 시 1~5』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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