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묵시록 외 1편
양해연
밤새 바다는 머리맡에 출렁였다
통증클리닉 의사는 단호하게 말했다
쇄골이 드러나도록 어깨를 열어젖히시오
젖은 뭄이 말라가는 중에도 통증은 계속된다
새하얀 지붕을 투과하지 못한 햇살이 부서지고 잠기는 해수면
절제된 해안선을 따라 잊혀진 서사가 되살아나는 곳
굳게 입을 다문 바다를 어떻게 용서할까
그림자가 원을 그린다
후회와 체념에는 비슷한 강도의 한숨이 있다
파도에 휩쓸려 조각나버린 꿈처럼
새로 난 상처가 해풍에 쓰리다
-전문(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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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 향수병
초원에서 달려온 달팽이는 향수병 때문인지 며칠째 미동도 없다 물조차 마시지 않는다 변덕스러운 조울의 포로가 되어 한없이 사랑스러운 촉수를 안으로 감추고 말라가고 있다 이마에 닿을 듯 내려앉은 밤하늘, 잡힐 듯 빛나는 북두칠성을 가리키던 더듬이로 초록 잎사귀를 한 번만 더 움켜쥐면 좋으련만
하늘 가운데를 가로지르던 빛줄기 수평선 너머로 곤두박질친다
멀리서 바라보면 별처럼 박힌 소와 말, 기분 내키는 대로 겅중대는 염소 무리는 종일토록 초원에 머리를 박고 쉴 새 없이 풀을 뜯는다 땅을 디딘 다리의 힘이 풀린 후에도 눈을 들어 허공을 응시하는 일 따위는 없다 싱싱한 풀이 시들기 전 몸을 살찌우는 것 외, 달리 중요한 게 있을 리 만무하다
-전문(p.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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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달팽이 향수병』 에서/ 2023. 10. 31. <서정시학> 펴냄
* 양해연/ 전남 목포 출생, 경기 이천에서 성장, 2016년『예술가』로 등단, 시집『종의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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