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제시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조재형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독일의 나치스 친위대 장교였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전범으로 체포되자 재판을 참관했고 책을 냈다. 이때 제시한 개념이 '악의 평범성'이다. 자신의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그녀는 홀로코스트와 같은 역사 속 악행은 광신자나 반사회성 인격 장애자들이 행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오히려, 국가에 순응하며 자신들의 행동을 보통이라 여기는 평범한 사람들에 의해서 행해진다고 하였다. 다시 말해, 악은 악에서 나온다기보다 평범한 사람의 무사유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아이히만이 체포되었을 당시 사람들은 그가 포악한 성정을 가진 악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반대로 지극히 평범하고 가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아이히만의 정신을 검진한 의료진 역시 그가 정상적이어서 오히려 자신들이 이상해진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재판에서 아이히만은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했고, 오히려 월급을 받고 일을 제대로 못 하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진술했다. 그는 내적인 갈등, 다시 말해 사유 없이 독일 공직자로서 관료주의의 효율을 위해 기술적으로 임무를 수행했을 뿐이라는 것이 한나 아렌트의 분석이었다. (p. 81-82)
A가 1억짜리 차용증을 소지하고 방문하였다. 변제에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채무자의 행태를 더는 묵과할 수 없으니 본안 소송을 제기해달라는 의뢰다. 서류를 살펴본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채권자가 너무 늦게 찾아왔다. 금전을 거래한 대여금 채권의 경우, 일반 채권으로서 민법상 그 시효는 10년으로 규정되어 있다. 그런데 10년이 지나서야 찾아온 것이다. 도대체 왜 지금까지 차용증을 가지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이제야 찾아왔느냐고 반문했다. 그동안 금고 속에 꼭꼭 숨겨서 보관하고 있었다는 답변이다. 차용증만 가지고 있으면 언제라도 돈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차용증을 마치 돈다발처럼 무한정 사용할 수 있는 화폐마냥 여긴 것이 화근이다.
차분히 설명해 주자 시효의 개요를 들은 채권자 A는 얼굴이 사색으로 바뀌었다. 어떻게 구제받을 방법이 없느냐고 발을 동동 구른다. 법적 비용은 얼마든지 댈 테니 소송을 제기해달라고 떼를 쓴다. 하지만 차용증에 걸려 있던 시효는 이미 만료되었고, 한 번 시효를 넘긴 권리는 후진이 안 되고, 유턴도 안 된다. 나라님조차 구해 주지 못하는 것이 소멸시효이다. (p. 96)
나는 곧바로 다른 청으로 자리를 옮겼고, 전근한 청에서 몇 년 더 머물다가 새파랗게 젊은 나이에 검찰을 떠났다. 나는 문학에 대한 갈망으로 검찰을 떠나기는 했지만, 어쩌다 맞닥뜨리게 되는 꼴불견도 내가 검찰을 떠나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것이다. (p. 179)
가급적 나는 그에 대하여 이것저것 생각하지 말고 자수라는 한 가지만 생각해야 했다. 한데 자수하지 않고 벗어날 방법이 있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사고가 났을 때 반응은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자수를 결심하는 사람이다. 막상 자수를 결심하면 담담해진다. 될대로 되라고 차라리 자기를 법에 맡기게 된다. 다른 하나는 더 깊이 자기를 숨기려고 시도하는 사람이다. 사건은 미궁 속으로 빠지게 되고 주연으로 데뷔하는 것이다. 형사들만 미궁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 자신의 삶을, 삶의 내일을 미궁에 빠지게 하는 데는 도피만한 게 없다. 하지만 더 오래 깊이 숨을수록 일상으로 복귀하는 데는 더 많은 대가를 치러야 한다. (p. 241-242)
그는 나를 만났던 그날, 자기 죽음을 예견이라도 하고 육친의 안위를 당부한 것이 아닌가. 병약한 편이었던 나와는 달리 건강에 불편한 구석이 없던 형이다. 당연히 형이 나보다는 장수할 줄 알았다. 그런데 형은 나를 앞지르기 하여 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는 나보다 죽음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 같았다. 그런데 그는 나보다 죽음에 쉽게 적응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것을 죽음으로써 증명해 보였다. 그는 나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이 죽음으로써 또 한 번 판명된 것이다.
그는 삶보다 죽음을 우위에 둔 건 아닐까. 꼭 어디로 떠나기 전에 문단속을 하는 사람처럼, 그는 집안 단속을 하였다. 삶보다 죽음이 더, 한 사람에 대한 전모를 드러내 보인다. 내가 그에 대해 알고 있던 모습은 그가 삶 안에서 보여준 제한적인 모습이었다. 죽음을 앞두고, 죽음 직전에 보인 그의 행보는 내가 알고 있는, 그에 대한 전면적인 수정을 요구하게 만든다. 비로소 그의 전모를 파악하게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삶은 그의 절반이었다. 죽음으로써 그의 전모가 완성된 것이다. (p. 259)
처음에 나는 그들이 진짜로 나를 좋아해서, 내가 잘나고 똑똑해서 내 곁에 머무는 줄로 착각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경청하고, 될 수 있는 대로 내가 하던 일에도 반영하려고 주의를 기울였다. 심지어 내 곁에 머무는 그들을 든든하게 여기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어느 날 예고 없이 내 앞에 출현한 어떤 불행으로 내가 거기를 떠나기로 결심하였을 때, 내가 휘두르던 주먹만한 권한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서 빈손으로 내려와 바닥을 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들이 그렇게 내 눈에서 멀어지며 비로소 나는 알게 되었다. 그들과 나의 거리는 내가 어떤 권한을 가졌을 때와 비례하고, 어떤 권한을 내려놓았을 때와는 반비례한다는 것이다.
그들로서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나와 변함없이 지내고 싶다는 약속은 맞는 말이다. 다만 내가 어떤 권한을 행사할 수 있을 때만 유효한 조건부 약속이었는데 나만 몰랐다. (p. 269-270)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전적으로 불행했다고 말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런데 나는 거기를 떠나올 때를 돌아보면, 내 곁에서 잽싸게 돌아서던 그들이 떠올라 지워버리고 싶다. 내가 모든 것을 잃고 다시 얻게 된 '파산의 결실'이 있기는 하다. 그것은 '사람'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그들이 나에게서 멀리 달아난 것을 알았을 때, 하나의 고약한 결심을 하였다. 함부로 마음을 열어주거나 가볍게 쓰지 말자고.
희한한 일이다.
휑하고 떠난 그들의 빈자리가 비어 있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이 떠나고 비어 있는 자리를 그들과는 다른 부류의 사람이 찾아와 채웠다. 내가 세상 속으로 뛰어 들어가 다시 만난 사람들은 내가 다시 넘어지거나 비틀거리는 기세를 보여도 내 주변을 지켰다. 내 바닥의 실체를 알고서 나를 찾아온 그들은 더 이상 나에게서 멀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그저 나만 보고 온 것이라 내가 앉아 있던 자리나 내가 차고 있던 계급에 대해서는 관심 밖이었다. 그들은 단지 내가 있으면 그만이었다. (p. 270-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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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재형_산문집 『말을 잃고 말을 얻다』 2023. 9. 25. <소울앤북> 펴냄
* 조재형/ 전북 부안 출생, 2011년 『시문학』으로 등단, 시집 『누군가 나를 두리번거린다』 등, 산문집『집은 텅 비었고 주인은 말이 없다』, 현)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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