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끼 홍학은 아프리카 중남부의 어느 작은 호숫가에서
박덕은
새끼 홍학은 아프리카 중남부의 어느 작은 호숫가에서 태어난다. 태어나자마자 건기乾期가 찾아오고, 물은 말라 서서히 소금호수로 변해 간다. 눈뜬 지 얼마 안 된 새끼 홍학은 25㎞나 떨어진 다른 호수로 걸어가야 한다. 걸을 때마다 새끼 홍학의 발에는 소금이 들러붙기 시작한다. 급기야 걷기에 몹시 부담스러운 소금뭉치가 엉겨 붙는다. 무거운 소금신발을 신은 새끼 홍학은 독하게 마음먹어야 호수까지 걸어갈 수 있다.
산다는 것은, 어쩌면 새끼 홍학처럼 무거운 소금신발을 신고도 독하게 걸어가야 하는 건 아닐까. 살다 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병에 걸려 병치레를 할 때가 있다. 그런 때도 나는 여전히 낡은 신발을 신고 병원에 갈 것이다. 병실에서 만나는 쓸쓸한 시간도 그 신발을 신고 담담하게 건너갈 것이다. (p. 230-231)
대나무는 씨를 뿌린 후 5년이 지나도 거의 자라지 않는다. 그러다가 갑자기 하루에 1m 가까이 자란다. 대나무의 1시간 길이 생장 속도는 30년 길이 생장 속도와 같다. 이것은 5년간의 뿌리 내림이라는 기다림이 있어 가능하다. 그 뿌리 내림처럼 그도 기다림을 비축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인생이란 기다림의 시간을 짓는 것이리라. 기다림을 통해서 단단해지지 않았다면 대나무는 가느다란 바람에도 모래성처럼 맥없이 쓰러졌을 것이다. 폭풍우 몰아치는 어둠 속에서 산산이 흩어지는 굉음을 견디며 새벽까지 기다려 본 자만이 여명을 만날 수 있다. (p. 264)
대금을 제작할 때 최고의 재료로 쓰이는 것은 쌍골죽이다. 병든 대나무라 하여 병죽病竹이라고도 불리는 쌍골죽은 마디 양쪽에 골이 패여 있다. 일반 대나무와는 달리 쌍골죽은 어느 정도 크면 더이상 자라지 않고 속이 두텁게 차오른다. 그런 상태로 힘들게 수령을 이어간다. (···) 쌍골죽은 일반적인 대나무보다 속이 꽉 차 있는데 속살의 두께가 1.3~2.4배가량 더 두껍다. 그 두께만큼 상처도 깊어 쌍골죽으로 만든 대금은 희로애락의 감성을 잘 짚어낸다. 대나무의 안쪽 벽에 바람의 흐느낌과 달빛의 울컥임까지 새겼기에, 감성의 깊이가 남다르다. 병들며 커 가는 아픔을 안고 자란 탓인지 애처롭고 처량한 느낌을 쌍골죽은 잘 표현한다. 상처 깊은 아픔이 한에 짓눌리지 않고 그 한을 넘어선 소리에 다다를 때까지, 대금을 만드는 사람도 쌍골죽 스스로도 기도의 시간을 가지며 이겨냈을 것이다. (p. 147 (···) 153)
대나무는 일본 히로시마 원폭 투하 속에서도 유일하게 살아남은 식물이라 한다. (···) 대나무의 뿌리는 그물처럼 서로 얽히고설키며 자란다. 그러면서도 대뿌리의 속은 비움이라는 신념을 행동으로 옮기듯 비어 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다림 앞에서 두려움 이겨내는 법을 터득한 것이다. 삐걱거리는 균형에 포기하듯 무작정 손 놓지 않고 욕심을 비우고 조급함을 내려놓는다. 비우며 기다렸기에 대나무는 강하다. 그래서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졌을 때에도 대나무는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인한 생명력을 지닌 대나무. (p. 148 (···) 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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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덕은 제4수필집 『바닥의 힘』에서/ 2023. 7. 10. <한림> 펴냄
* 박덕은/ 1952년 전남 화순 출생, 198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1979년 ⟪전남일보⟫ 신춘문예 동화 부문 당선, 시집『느낌표가 머무는 공간』 외, 수필집『창문을 읽다』외, 소설집『죽음의 키스』외, 문학이론서『현대시창작법』외, 전) 전남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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