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산나무는 다른 말로 동구나무, 정자나무로 불린다
배홍배
당산나무는 다른 말로 동구나무, 정자나무로 불린다. 남도에선 사장나무라 불리기도 한다. 마을이 처음 형성될 때 동네 어귀에 느타나무, 팽나무, 회화나무, 이팝나무 등을 심어 마을의 안과 밖을 구분했다. 그중 영원성을 부여받은 나무가 당산나무다. 이 영원성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통합하는 일종의 신성神聖으로 샤머니즘이라고 하는 우리 무속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하늘과 땅, 나무와 풀들의 말을 이해하는 우주의 모든 음성의 고향이다. (p. 57)
당산나무는 느티나무가 많다. 괴목槐木이라 불리기도 하는데 귀신과 나무가 한 몸을 이루는 신목神木으로 여겨지는 나무여서 사람과 당산나무가 관련된 이야기들이 많다. 60년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일 무렵 동네 가꾸기 사업의 일환으로 마을 길을 넓히거나 할 때 당산나무를 없앤 경우들이 많이 있었다. 나무를 벤 사람이 급사하거나 당산나무를 베어 내고 갑자기 마을에 변고가 생긴 일화들을 종종 들었다. 우리에게 당산나무는 단순한 식물적 존재가 아니었다. 나무는 사람의 가슴에 뿌리를 내리고 막막한 인간의 풍경을 견뎌왔다. 나무와 사람은 서로의 꿈으로 서로를 지배하고 나무가 가지를 벋는 공중은 사람의 꿈속 한자리였다. (p. 67)
어릴 적 새로 이사 간 동네의 당산나무는 왕팽나무였다. 당산나무라기보다는 정자나무였다. 느티나무는 귀신이 깃든 괴목(槐木이어서 생기 보단 죽음의 기가 더 많은 나무다. 느티나무로 불을 때서 밥을 지어 먹으면 사람이 죽거나 그 아래서 잠을 자다가 횡사를 당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와 마을의 숨터나 아이들의 놀이터로 이용되는 정자나무는 팽나무가 많았다. 500살도 더 된 팽나무는 어찌나 키가 크고 그늘이 넓었던지 온 동네 사람들이 그 아래 들어가고도 남았다. 팽나무는 남은 한 귀퉁이를 낯선 사춘기 소년에게 은밀히 내주었다. (p. 81)
은행나무는 오래 사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신생대 시대부터 수억 년 지구상에 존재해 온 은행나무는 살아있는 화석으로 불린다. 느티나무와 팽나무, 회나무에 비해 훨씬 장수하는 수목이지만 당산나무로 모셔지는 은행나무는 없다. 나무가 가지고 있는 독성으로 인해 신이접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그 우람한 크기와 넓게 드리우는 가지, 촘촘하게 돋아나는 넓은 잎사귀들은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한 방울로도 흘리지 않아 어른들의 휨터나 아이들의 놀이터로서의 정나나무로 남아있는 은행나무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아름다운 수형과 가을의 노란 은행잎은 풍치수로서도 각광을 받아 가로수로 많이 심어졌다. (p. 85-86)
지금 저 연약한 나무다리를 휘감는 강물은 그 옛날 쫓겨 간 어린 임금을 따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시대를 흐르고 흘렀을 것이다. 흐르다 몇 물살 뒤로 물러나는 것이 강의 눈물이라면 강 건너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며 돌아볼 때 뼝대의 물속 정강이로 한 금 퍼렇게 멍이 갔을 것이다. 조선의 숙종 임금은 그렇게 영월의 섶다리를 건너 장릉을 참배했다. 삐걱거리는 다리를 건너 나무의 전생까지 건너오는 길엔 깨끗한 숲이 울창하다. 한시적 운명을 향해 머뭇거리는 풍경의 막바지는 아, 그리운 고향, 하늘에 반달 떴다. (p. 97)
요즘의 시들을 나름대로 호의적으로 침착하게 읽어볼 때가 있다. 비 감각적인 사고가 감각적인 용어로 표현될 때 독자가 경험한 유사성에 의해 명료해지는 이미지를 통하여 사고가 고양되는 것이 시의 현실이지만, 요즘의 시들에선 독자들이 경험한 유사성이 배제되고 있다. 정의되지 않은 미지의 사물이나 사상이 그대로 미지의 견지에서 정의된 채 표류한다. 물론 회화나 조각 같은 예술 측면에서 본다면 이는 부분적으로 정의될 수 있겠지만 이는 시각이나 청각에 의존하기 때문에 인간의 사고를 통하는 유사성과는 거리가 멀다. 자칫 현란한 수사학적 과장으로 시 현실을 포장함으로써 영혼 혹은 자아를 자신에게로 가까이 끌어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무의식의 황무지를 헤매게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p. 201)
시인으로서 시인의 직접적인 임무는 모국어에 대한 사랑이다. 일부 특별한 감정을 가진 시인은 우리 모국어의 한계를 참을 수 없을 것이다. 모국어의 생명은 시인들에 의해서 결정지어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적인 요인이나 개성의 개별적인 제반 요인들 속에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는 복잡한 환경에 의존한다. 나는 영어를 전공했고 영어로 밥을 먹고 살아왔다. 영러로 쓰인 명시라고 하는 시들을 아무리 읽어보아도 우리 시이 삼류 시만큼도 감흥이 일지 않는다. 영어로 번역된 우리 시를 읽어도 마찬가지다. 우리말의 사회적 기능, 나아가서는 우리의 정서를 이끌어간다는 신념으로부터 탈피하지 않기를 나 스스로 바랄 뿐이다. (p. 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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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홍배_산문집 『내 마음의 하모니카』 2023. 9. 11. <시산맥사> 펴냄
* 배홍배/ 1953년 전남 장흥 출생, 2000년『현대시』로 등단, 시집『단단한 새』『바람의 색깔』『라르게토를 위하여』, 산문집『추억으로 가는 간이역』『풍경과 간이역』『송가인에서 베토벤까지』『Classic 명곡 205』등, 오디오평론가, 사진가, 번역 활국시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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