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포들
나희덕
린 마굴리스는 말했지
진화의 가지런한 가지는 없다고
가지런한 가지는 생명의 궤적이 아니라고
한 번도 질서 정연한 적 없는 생명,
생명의 덩굴은 어디로 뻗어 갈지 알 수 없어
그야말로 소용돌이
칼 세이건은 말했지
우리는 아주 오래전 별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졌다고
빅뱅에서 만들어진 수소와 헬륨,
그 원소들로부터 왔다고
우리 몸에는
인간 세포 수보다 박테리아 수가 좀 더 많다지
물론 우리와 평생 함께하는 세포는 없어
길어야 칠 년이면 사라지니까
그래도 세포가 깨끗이 재생된다면
인간은 190년 정도를 살 수 있다고 하던데
근육과 혈관 속의 세포들은
매일 조금씩 사라지거나 생겨나는 중
대체 무엇을 나라고 부를 수 있을까
방금 어깨를 부딪치며 지나간 사람,
그를 돌아보는 동안에도 세포 몇 개가 사라졌겠지
진화는 세균들 사이의 사건,
우리가 생물학적으로 아름답고 복잡한 것은
박테리아와 미토콘드리아 덕분이라고 린 마굴리스는 말했지
진화의 가지런한 가지는 도무지 없다고
-전문, 「세포들」(『포지션』, 2022. 여름)
▶인류세 시학/ '인류세' 시대에 시를 쓰고 읽는 것(발췌) _고봉준/ 문학평론가
결국 생태적으로 사유하면서 살아간다는 것은 만물을 지배하는 하나의 척도, 즉 인간이라는 척도가 있다는 잘못된 관념과 단절하는 것이고, 세계에서 하나의 척도가 아닌 수많은 척도가 존재한다는, 인간 이외의 존재들 또한 나름의 고유한 시간성을 지닌 채 우리와 공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이러한 공생의 인식은 종종 생태, 자연, 환경 같은 단어를 앞세운 문학에 의해 왜곡되곤 한다. 가령 '인간'과 '자연'이라는 근대적 대립을 극복하는 방안으로 '인간'을 '(대)자연'에 포함시키는 것, 즉 인간도 결국 '자연'의 대립이라는 근대적 인식을 극복한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이라는 낭만주의의 발명품을 공유하고 있다는 점에서 '근대성의 헌법'에 포함된다고 말할 수 있다.
*
최근 발표된 나희덕의 시편들은 역사, 즉 인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간 감각에 근거하고 있다. 시집 『가능주의자』(문학동네, 2021)에 수록된 「홍적기의 새들」이나 「빙하 장례식」같은 작품들이 지질학적인 시간에 해당한다면, 이 시에서 '린 마굴리스'는 진화의 시간을, '칼 세이건'은 천문학적인 시간을 각각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시간 감각은 '현재'조차도 두렵고 깊은 시간으로 인식한다는 점에서 근대적 시간 개념과 전혀 다르며, 이전의 시간을 끊임없이 '과거'로 밀어내면서 단절과 부정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모더니즘의 미학과도 다르다. 알다시피 '인류세'는 "인간이 만든 물질이 지구 지각에 층을 형성한 지질시대"5)를 가리키는 지질학적 개념이다. 천문학, 진화론, 지질학 같은 학문을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이렇게 거대한 시간의 스케일을 지각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다. 특히 분, 초 같은 미세한 시간 단위로 인해 중요한 문제가 결정되는 현대사회에는 지질학적 시간 같은 것이 틈입할 여지가 없다. 그런 점에서 모더니즘 미학이야말로 근대 이후의 삶에 밀착된 예술론이라고 말할 수 있다. (p. 시 188-190/ 론184 * 190-191)
5) 티머시 모튼, 『생태적 삶』, 김태한 역, 엘피, 2023, p_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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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간 파란』 2023-여름(29)호 <criticism>에서
* 고봉준/ 2000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가로 등단, 평론집 『유령등』『비인청적인 것』『문학 이후의 문학』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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