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무늬를 가진 것들/ 조혜은

검지 정숙자 2013. 3. 4. 01:50

 

 

    무늬를 가진 것들

 

      조혜은

 

 

  하루는 손등 위에

  육각의 무늬를 그려 넣고

  바다거북이 되었다

 

  그래도 헤어질 땐,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 끝에 맺힌 적갈색 상처를 찍어

  발등에 바르고,

  웅크려 앉은 정방형 바닥부터

  봄에 내린 비가 차오르면

  산란지를 잃고 떠도는 붉은 바다거북이 되었고

 

  그렇게 헤어져도, 눈꺼풀이 무거웠다

 

  어제는 손바닥에

  죽은 새끼 거북의 방패 무늬 등껍질을 쥐고

  적송이 되었다

 

  다시 만날 땐, 더 단단한 껍질을 가지려고 잇몸을 드러내고 웃었다

 

  잇몸 끝에 드러난 송곳니로 팔뚝을 물어

  붉은 가지를 만들고,

  음부 아래로 당신의 손가락만 한 노란 성기가

  꽃무늬로 피어나면,

  푸른 손톱으로 솔방울을 움켜쥐는 소나무가 곧 내가 되었고

 

  당신을 다시 만날 때마다, 갈라지고 갈라지고 갈라졌다

 

  내일은 볼록한 아랫배 위에

  바늘로 소나무 무늬를 찔러 넣고

  호박 등이 되려 한다

 

  눈을 뜨면, 나체로 묻고 나체로 말하고

 

  나체로 된 슬픔을 배꼽 위로 흘려

  온몸을 갈색으로 물들이고

  갈색 호박 등 안에 숨어 곡선의 춤을 추는

  몸통뿐인 

  여인의 무늬가 되려 한다

 

  눈을 떴을 때

  모든 건 꿈뿐인

 

  나는, 무늬를 가진 것들

 

 

  *시집『구두코』에서/ 2012.12.31 (주)민음사 펴냄

  *조혜은/ 서울 출생, 2008『현대시』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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