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영일(寧日)/ 홍경나

검지 정숙자 2023. 10. 22. 02:34

 

    영일寧日

 

     홍경나

 

 

  사수자리

 

  오그라진 등을 더 옹송그리고 삐주룩이 몇 올 터럭만 남은 눈썹 참 난처한 사수자리 예순여덟 당신을 떠올립니다

  레토로트카레 일 인분을 데워 저녁을 차렸는데 당신이 가만하게 건너편 의자를 당겨 앉습니다 담장 아래 색을 엎지르는 샐비어 쇠한 그림자 같은 당신을 마주합니다 버릇대로 머그잔에 생수를 따라 건네며 "그러엄 나는 잘 지내지" 하고 대답하고 맙니다

 

  기척

 

  찌르레기 한 마리 무심히 날아왔다가 날아가는 아침마다 한참을 앉았다 날아가는 빈 가지가 2022년 12월 24년 떼어 낸 벽걸이 달력이 있던 흰 자리 같습니다 꼭 떠난 당신 자리 같다고 혼잣말을 합니다 속수무책 "세상에나 잘 지내고 있는 거지", 기어이 묻고 맙니다

 

  냄비 밥이 마침맞게 뜸이 들고

  은행나무가 말 붙여 올 듯 우두둑우두둑 봄 기지개 켜는 것을 지켜보다가 매일 운동하기 라면 덜 먹기 화분 관리 잘하기 따위 새삼스런 다짐을 합니다

  나도 모르게 입술에 새는 당신이라는 발음처럼 가스 불 위에 냄비 밥이 소리 내며 마침맞게 뜸 들어가는 것을 듣다가 저편 북쪽 끝까지 소리 없이 뻗는 비행운을 무심히 바라봅니다

    -전문(p. 10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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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사사』 2023-여름(114)호 <이 계절의 신작시 1> 에서

  *  홍경나/ 1991년  『시사사』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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