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양강
함명춘
강이 흐른다, 바다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기 위하여
안겨서 깊이 박힌 못을 뽑아주고
지워지지 않는 못 자국을 씻겨주기 위하여
강줄기는 그 기나긴 여정의 발자국이다
한 번이라도 가슴에 금 간 적 있었던 사람들이
염소 무리처럼 강가에 모여든다
두 귀를 지나 가슴속까지 범람하는
강물을 안고, 어떤 이는 침묵 속에 자신을 놓아두거나
강둑을 따라 정처 없이 걸으며
진정으로 아파 본 자는 안다
구름을 헤집고 나온 사소한 한 줄기 빛도
시들은 꽃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다는 것을
발바닥에 잡힌 물집을 터뜨리며
이 순간만큼은 누군가에게 한 줄기 빛인
강이 흐른다 가슴에서 가슴으로
그 누군가의 가슴에 안기지 못한
강물만이 바다로 흘러간다
-전문(p. 7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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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사』 2023-여름(114)호 <이 계절의 신작시 1> 에서
* 함명춘/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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