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과 보리
유계영
밀폐용기 속의 씨앗이 나에게 알려준 것이 있다면
1. 마음은 축축하게 가꿀 것 2. 몸은 힘껏 개방할 것 3. 시간이 흘러가게 할 것
언제나 축축하고 열려있는 눈동자에서 사물이 태어나는 이유다
그러나 공간과 시간만으로 발생하는 것은 없으므로
외로움을 모르는 사람에겐 자신의 티셔츠 속에 고개를 처박고 고함 일도 없을 것이다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을 뽑으며 나는 재빨리 늙어간다
씨앗 한 톨이 씨앗 한 톨보다 크게 폭발하는 것에
왜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일까
-전문- 304
♠ 아토포스가 선정한 우수시 깊이 읽기(부분)_ 박남희/ 시인 · 문학평론가
이 시에서 화자는 밀이나 보리가 자라는 모습을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을 뽑으며 재빨리 늙어간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등허리에 꽂힌 시계초침"은 무얼 상징하는 걸까? 밀과 보리 씨앗의 외관을 고려하면 씨앗의 중간에 세로로 나있는 줄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인간의 관점에서 보면 허리가 상징하는 젊음과 늙음의 시간적 계기성을 시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읽히기도 한다.
이 시를 단순히 곡식을 발아시키는 과정이 아닌 메타시나 사랑시로 읽히게 하는 것은 이 시의 마지막 연 "씨앗 한 톨이 씨앗 한 톨보다 크게 폭발하는 것에/ 왜 아무도 놀라지 않는 것일까"라는 화자의 반문 때문이다. 시나 사랑은 공통적으로 작은 것을 엄청난 크기로 증폭시키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밀이 여러 겹에 싸여있는 신비롭고 말랑말랑한 존재라면 보리는 단단한 알갱이를 품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이러한 속성이 공통적으로 시와 사랑의 속성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이 시의 다중 시적 성격이 드러난다. (p. 시 304/ 론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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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토포스』 2023-여름(2)호 <아토포스가 선정한 우수시 깊이 읽기> 에서
* 박남희/ 1996년《경인일보》 & 1997년《서울신문》신춘문예로 등단, 시집『폐차장 근처』『이불속의 쥐』『고장 난 아침』『아득한 사랑의 거리였을까』, 평론집『존재와 거울의 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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