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줄 노트

백제 정신은 무엇일까요/ 김기옥(김밝은)

검지 정숙자 2023. 9. 5. 17:04

 

    백제 정신은 무엇일까요

 

     김기옥/ 본명, 김밝은

 

 

  문효치가 백제라는 시적 공간을 만남으로써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연결하고자 우주적 상상력을 펼쳐보이는  백제시가 하나의 시세계로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백제시에 나타난 백제 표상과 그 의미를 밝혀보는 일은 중요하다. 또한, 문효치 시에서 백제 표상은 어떻게 구축되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죽음 극복과 영원 추구는 백제시에서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를 확인하는 작업도 중요하다. 여기에 본 연구의 의의를 부여할 수 있다. (p. 3)

 

  문효치에게 백제는 죽음 극복과 영원성을 확보하게 해 줄, 무궁무진한 광맥을 품고 있는 공간으로서의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 백제라는 비어 있는 공간에서 마음껏 상상의 세계를 펼치면서 신체적인 건강뿐만 아니라 정서적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고 문효치만의 백제시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문효치의 시세계를 언급할 때 백제시를 떼어놓고 말하기는 어렵다. (p. 45)

 

  문효치가 "경박한 유행의 시어나 조사법을 동시대의 시인들과 나누어 쓰지 않는 것도, 시의 규범을 비평적 수요에 틀어맞추지 않는 것도 모두 전통 존중적인 시작 태도 또는  불교적 세계인식의 기틀에 발을 담그고 있기 때문이다."131) 문효치 스스로는 "우리의 문화적 유전인자의 통로로서 백제시는 그 나름의 구실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백제인은 우리의 조상이고 백제문화는 우리 문화 전통의 한 축"132)이라고 했다. 백제의 정신은 한국의 의식, 한국인의 정서라서 형태는 바뀌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 그런 정신이라는 것이다.133) 그러므로 1500년 전 백제의 흔적, 백제 사람들의 삶과 죽음 등을 되살려서 백제시에 담아내는 일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p. 53~54)

  131) 홍기삼, 「전통 또는 백제의 시」,  『문효치의 시 읽기』, 지햬, 2012, 336쪽

  132) 문효치, 「백제를 구실로 한 작은 상상의 세계」, 『시와시학』 2006 -가을호, 166쪽

  133) 문효치, 본 석사논문 99쪽 <인터뷰> 참조// (이 블로그에 '99쪽' 수록되어 있음)

 

  : 그렇다면 그 연장 선상에서, 선생님의 백제시에 계백에 대한 시가 나옵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있는 계백은 그야말로 백제를 위해 결사항전을 한 장군으로 알고 있는데 선생님 시에서 나타내고자 하신 계백도 저항정신을 대변하는 인물로 볼 수 있을까요? 

  : 보는 관점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겠죠. 그런데 내가 의도했던 것은 이 계백도 기행시로 쓰고 싶지 않았던 거죠. 이것도 미학적인 시로 쓰고 싶었던 거예요. 계백의 칼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애국정신 또는 정의감 이런 것의 상징물이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그대로  애국정신의 상징으로만 치부한다고 하면 기행시의 범주에서 벗어나기 어려워요. 그것은 우리가 역사적으로 다 아는 사실이에요. 그 지식을 그대로 시에다가 실어 낸다고 하면 시로서의 어떤 창의적 세계가 성립될 수 없죠. 나는 계백의 칼에 대한 가치를 어떻게 미학적으로 변이시켜서 표현할까에 대한 고심이 있었죠. 그래서 그 칼의 가치를 적의 목을 벤 단순한 무사의 칼이 아닌, 더욱더 높은 정신의 가치를 구현한 칼로 만들어보려고 노력한 것입니다. 그래서 햇빛을 잘라내서 황산벌을 물들였다는 것은 전쟁에 이겨서 황산벌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그 햇빛이라고 하는 새로운 미적 에너지, 그 에너지를 가지고 황산벌을 물들인 칼, 그런 칼로 승화시켜 보려고 노력한 것이죠. 그런데 여기서 "잘라냈다든지, 스러져가는 목숨을 꽃수 놓고 그려 놓았다든지, 일몰했는데 꿈으로 가득히 밝혔다"든지 하는 것은 어쩌면 단명한 것, 또는 스러져가는 것, 침해당하는 것의 가치나 생명을 북돋워 준다는 의미에서 어쩌면 부정한, 불의의 힘에 저항하는 면모가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p. 98)

 

  : 계백의 칼에 선생님의 자아가 어느 정도 투여되지 않았을까 생각을 했던 터라 여쭤봤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백제시에서 드러내고자 하셨던 백제 정신은 무엇일까요.

  : 백제 정신은 일단은 우리 한국의 의식, 한국인의 정서예요, 그래서 우리 문화의 가치를 구현한다는 것이 내가 백제를 대하는 정신이지만 그 백제 정신은 어떻게 보면 불변의 정신이에요. 불변이라는 것은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형태는 바뀌더라도 본질은 바뀌지 않는다는 그런 정신, 이것이 백제의 정신이라고 봅니다. 그런 점에서 생각해보면 내가 미당 선생님의 영원성에서 영향을 받지 않았나 생각을 합니다.

  백제는 망한 나라지만 본질적인 것은 변하지 앟고 지금도 우리의 피와 살 속에 흘러내려 오고 있다, 이런 건 좀 막연하긴 하지만 그런 정신이라 할 수 있고, 내가 더 주안점을 둔 것은 백제가 역사 속에서 많이 비어 있는 공간이에요. 말하자면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등 역사서에서 많이 인멸시키거나 훼손시키거나 아니면 소홀히 다뤘거나 공백으로 놓아둔 이런 부분들이 많은 역사예요. 그래서 그 빈 공간에 시인의 상상력이 투여되어서 그 상상력이 마음껏 뛰어놀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구축해내는, 그럼으로써 백제의 불변, 말하자면 영원성을 다시 살려내려는 그런 것이 거기에 투여되었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p. 99)

 

  : 지금까지 출간하신 시집에서 1993년 출간하신 제5시집 『바다의 문』과 2011년 이루 발간하신 시집 중에서는 『별박이자나방』 『모데미풀』 『바위가라사대』와 시조집 『나도바람꽃』을 제외하고는 적게는 2편에서 많게는 30편까지 백제시가 꼭 들어갔는데요. 이렇게 백제시를 계속해서 쓰신 이유가 있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첫째는 나하고 맞는 거죠. 내 마음이 쏠리는 거예요. 그쪽으로, 그건 왜 그럴까, 아마 내가 백제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억울하게 샹한 힘에 의해 만해버린 그 백제를 내가 연민의 정으로 바라보면서 사랑한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고요. 또 우연하게도 내가 태어난 지역이 백제의 고(古)터예요. 호남지방이 백제의 고터지요. 그러니까 아무래도 내가 백제의 후손이라고 하는 의식이 작용됐을 겁니다. 물론 나중에 신라가 백제까지 통일했기 때문에 신라의 후손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에 내가 백제의 후손이거든요. 그런 것도 작용했을 겁니다. 그래서 늘 백제에 관한 관심으로 백제에 대한 사서도 많이 읽고, 사서 중에도 제도권 사학자들의 역사책 말고 제야 사학자들의 재도 꽤 있어요. 그 사람들은 백제를 다른 관점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도 좀 뒤적거려 보고······.

  백제의 문화유산이란 게 참 희박해요, 적어요. 왜냐면 패전국은 다 인멸시켜 버리잖아요. 예나 지금이나. 그래서 정림사지5층석탑이라든지 미룩사지 석탑이라든지 그 몇 개 외에 별로 남아있는 게 없어요. 무령왕릉이 발굴돼서 규모가 작은 유물들은 많이 보완됐지만 큰 절이라든지 건물이라든지 이런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에 대한 연민의 정 이런 것도 많이 작용했을 겁니다. 그래서 마음이 끌려요. (p. 100)

 

  : 강희근 시인은 글에서 "문효치 시인은 백제로써 부활했고 그의 스승인 미당의 '신라'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보했다"고 했느고, 윤애경 평론가는 선생님께서 "백제를 선택한 동인으로 우선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그의 스승 미당의 신라 정신에 상응하고자 한 것으로 읽을 수있다"라고도 했는데요. 선생님께서 제자이시다 보니 미당의 신라시와 나란히 언급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선생님께 직접 들어보거나 글에서 대한 적이 없다 보니 미당의 신라와 선앵님의 백제가 나란히 언급되는 것에 대해 어떤 마음이신지 듣고 싶습니다. 

  : 시라는 것은 허공에 수없이 자유롭게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언어 중에서 필요한 것을 시인이 채택해서 하나의 집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미당은 신라에다 그 말을 붙여서 집을 짓고 나는 백제에다 그 말을 붙여서 집을 짓는 것이죠. 그런데 그 집의 모양과 집의 질은 다르다는 거죠.

  내가 백제를 하게 된 것은 우리 스승이 신라라고 하는 나라 이름을 체택해서 쓰신 것에서 영향을 받은 거예요. 내가 문청 시절에 미당의 신라 정신이 무엇인지도 제대로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냥 흠모하는 마음으로 아 저분이 신라라는 나라 이름을 채택했구나, 그럼 나는 백제, 내 고향의 고터인 백제를 한 번 해볼까? 이런 것도 조금은 작용을 했습니다. 그런데 나는 사람들이 간혹 미당하고 나를 비교하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굉장히 송구그럽고 황송하고 몸둘 바를 모릅니다. 내가 아무리 백제를 했다고 해도 미당의 신라의 세계에 접근하지는 못해요. 그러니까 나는 제자로서 못난 제자입니다. 제자가 스승의 경지를 딛고 올라설 수 있어야 제자로서 의미가 있는데 나는 그냥 미당을 좋아만 하지 그 경지에 오르지도 못했고, 그래서 부끄럽지요. 질로는 미당 선생을 뛰어넘을 수 없으니까 양으로라도 한번 해보자, 그래서 미당의 신라시보다 내가 양으로는 많아요. 그것을 그냥 위안으로 삼는 거죠. (p. 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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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 사 학 위 논 문

  문효치 시에 나타난 백제 표상 연구 : 김기옥(본명, 김밝은)

  지도교수 :  박옥순 (본명, 휘민)

  이 논문을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2023년 6월

 

  김기옥의 문학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2033년 7월

  위원장 : 김춘식

  위   원 : 전영주 (본명, 전해수)

  위  원 : 박옥순 (본명, 휘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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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옥(본명, 김밝은)/ 시인

  * 석사학위논문 문효치 시에 나타난 백제 표상 연구」(2023. 7.)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