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최정례(1955~2021, 66세)
그러니, 제발 날 놓아줘,
당신을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러니 제발,
저지방 우유, 고등어, 클리넥스, 고무장갑을 싣고
트렁크를 꽝 내리닫는데······
부드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플리즈 릴리즈 미가 흘러나오네
건너편에 세워둔 차 안에서 개 한 마리 차창을 긁으며 울부짖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만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운전수가 튀어나와
아줌마, 내가 이렇게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 모르네
쇼핑 카트를 반환하러 간 사람, 동전을 뺸다고 가서는 오지를 않네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내가 도는데 아저씨가 갑자기 핸들을 꺾었잖아요
듣지도 않고 남자는 재빨리 흰 스프레이를 꺼내
바닥에 죽죽죽 금을 긋네
십 분이 지나고 이십 분이 지나도 쇼핑센터를 빠져나가는 차들
스피커에선 또 그 노래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그 나물에 그 밥
쟁반만 한 다알리아에 주먹만 한 벚꽃
그 노래에 그 타령
지난번에도 산 것을 또 사서 실었네
옆 차가 내 차를 박았단 말이야 소리쳐도
은영이는 전화를 끊지를 않네
훌쩍이면서
여기는 블루베리가 공짜야 공원에 가면
바께쓰로 하난 가득 따 담을 수 있어
블루베리 힐에 놀러가서 블루베리 케잌을 만들자구
플리즈 릴리즈 미,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거든
그녀의 입술은 따스하고 당신의 것은 차거든
그러니 제발, 날 놔줘.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놓아달란 말이야
- 시집 『레바논 감정』, (2006. 문학과지성사) 전문
▣ 중첩된 착란의 시간의식과 확장된 몸/ 2. 착란의 순간, 중첩된 시간의식(발췌)_이구한/ 문학평론가
현대인의 일상적인 생활은 여유롭지 못하다. 스피커에선 '플리즈 릴리즈 미' 노랫소라가 흘러나오고, 쇼핑카트를 반환하러 간 은영이는 돌아오지 않는다.
"이 나라는 다알리아가 쟁반만 해, 벚꽃도 주먹만 해/ 지지도 않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피어 있다고/ 은영이가 전화했을 때" "느닷없이 옆 차가 다가와 내 차를 꽝 박네" "아줌마, 내가 돌고 있는데/ 거기서 튀어나오면 어떻게 해/ 그래도 노래는 멈출 줄 모르네" "이런 삶은 낭비야, 이건 죄악이야/ 날 놓아줘, 부탁해, 제발 다시 사랑할 수 있게 날 놓아줘" 노래는 계속된다.
매우 경쾌하게 묘사된 화자의 현재의 시간은 은영이와 통화 중인데, 자동차 사고가 일어났고, 스피커에선 노랫소리 멈출 줄 모르는 이 사건들은 세 개의 방향에서 동시에 다발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시간에 매달려 있음은 사건에 매달려 있음을 들춰내고 있다. 노래 가사 재용도 하나의 대상에서 홰방되는 것은 다시 새로운 대상에 마달리게 됨을 강조하고 있다. 즉 자아는 자신의 힘이 아닌 타자에 의해 삶을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묶여진 시간은 사랑을 자율적으로 생성하고 지속하도록 놓아주지 않는다.
텍스트 안의 사건은 실제 현장에서 일어난 사건이다. 화자는 바쁜 일상으로 인해 세 개의 시간이 중첩되어 있다. 시간이 중첩된 시점에서 공간의 거리감이 없어지 착란을 일으킨다. 복잡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현실적인 사건은 계속 발생하고 있다. (p. 시 226-228/ 론 228-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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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구한 문학평론집 『착란의 순간과 중첩된 시간의식』에서/ 2023. 7. 1. <상상인> 펴냄
* 이구한 (본명, 이광소(시인)/ 1942년 전북 전주 출생, 1965년 문공부 신인예술상 시 부문 & 2017년『미당문학』으로 평론 부문 당선, 시집『약속의 땅, 서울』『모래시계』『개와 늑대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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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내: 이 블로그에서 <레바논 감정 외 1편> 검색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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