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들녘에서
강경호
죽음으로 일생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서둘러 유품을 태우고 흔적을 지운다 해도
들녘엔 푸른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
거기 강물 끝 어딘가 무엇이 된 질긴 목숨이
손짓 발짓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다.
한때 네가 살던 마을에도
나지막한 산언덕 오래된 봉분은 있다.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 무심해진다 해도
생전의 착한 것, 죄가 되는 것
어딘가를 떠도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아직도 너는 내게 불씨로 글썽이는데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무엇이 되어 다시 살아왔듯이
무엇이 되어 다시 살아올 것을 믿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뜨거운 불씨로 이글거리는 것
차마 가슴 저며
숲과 강마다 살아 타오르는 것을 보라.
먼 옛날 무엇이었던 네가
저렇듯 수백 번 옷을 갈아입고
봄 들녘 또 누군가를 눈부시게 부르고 있다.
- 시집 『함부로 성호를 긋다』, 천년의 시작, 2004, p_41, (전문)
▣ 휴머니즘과 생명성, 그리고 염결성의 시학/ - 가족의 서사와 삶의 본질 모색(발췌)_강나루/ 문학평론가 · 시인 · 수필가
강경호의 시에는 가족을 노래한 작품들이 많이 등장한다. 주지하다시피 '가족'은 가장 따스한 온기가 있는 사랑의 공동체이다. 가족은 공동운명체여서 희로애락을 함께한다.그러므로 가족관련 작품들에서의 시적 상상력은 대상에 대한 서정적 감응이 주는 위안의 세계로 기울고 있다. 시인이 지닌 시적 상상력의 기본바탕을 이루고 시인이 마음의 의지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육친에 대한 원초적 친화감과 정서적 일체감이다. 그러므로 그의 가족 관련 시는 삶의 고단함과 힘겨움에 대한 깊은 연민의 시선이 깃들어 있다.
이처럼 강경호 시학의 한 측면은 가족을 둘러싼 가족사를 자기 삶을 갈무리하는데, 외증조부모로부터 시작하여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작은아버지, 누님과 매형, 동생, 자식들, 그리고 장모님과 처남, 처남댁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며, 시간적으로도 80여 년의 시공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이러한 그의 가족사는 일정한 시간의 흐름에 규정되는 존재의 연속성에 관심을 두는 인식 및 표현양식을 갖는 서사(敍事, narrative)에 충실하다. 그런 까닭에 일상성의 발견 외에도 삶의 서사를 갈무리하는데 공력을 들이고 있다.
(···)
강경호의 시에서 가족사를 그린 최초의 작품으로 죽은 아우를 그리워하는 정조를 보여주는 이 작품(「봄 들녘에서」)은 "죽음으로 일생이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라는 단호한 어조로 시작된다. "유품을 태우고 흔적을 지운다 해도/ 들녘엔 푸른 핏줄처럼 꿈틀거리는 것이 있"다고 한다. "거기 강물 끝 어딘가 무엇이 된 질긴 목숨이/ 손짓 발짓으로 누군가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시적 자아의 인식은 '들녘이며 강물 끝', 즉 들과 강, 또는 산에 푸르게 자라고 있는 것들이 실은 죽었다가 무엇인가로 다시 태어난다는 윤회관輪廻觀에 기대어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순환한다는 자연의 섭리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너를 기억하는 사람들 모두 무심해진다 해도/ 생전의 착한 것, 죄가 되는 것"조차 "어딘가를 떠도는 그리움으로 남아"있기 때문에 육신은 죽어도 망자의 삶의 서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고 하는 것은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진 까닭이다. 이렇듯 시적 자아의 의식은 순환론에 기울어 있어 죽은 아우를 그리워하면서도 "무엇이 되어 다시 살아올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시적 자아는 "숲과 강마다 살아 타오르는 것을 보라."고 한다, 그것들이 언젠가 죽은 누군가들이 다시 살아왔듯이 "먼 옛날 무엇이었던 네가/ 저렇듯 수백 번 옷을 갈아입고/ 봄 들녘에 또 누군가를 눈부시게 부르고 있다."며 봄 들녘에서 누군가를 부르는 푸르게 살아오는 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p. 시 78/ 론 76-78 (···)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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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나루_강경호 시 연구 『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에서/ 2022. 9. 30. <시와사람> 펴냄
* 강나루/ 1989년 서울 출생, 2020년『아동문학세상』으로 동시 부문 & 2020년『에세이스트』로 수필 부문 & 2020년 『시와사람』으로 시 부문 등단, 시집『감자가 눈을 뜰 때』, 에세이집『낮은 대문이 내게 건네는 말』, 동시집『백화점에 여우가 나타났어요』, 연구서『휴머니즘과 자연의 수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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