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봉틀과 오븐
박연준
늙는다는 건
시간의 구겨진 옷을 입는 일
모퉁이에서 빵 냄새가 피어오르는데
빵을 살 수 있는 시간이 사라진다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높은 곳에 올라가면
기억이 사라진다
신발을 벗고 아래로 내려오면
등을 둥글게 말고
죽은 시간 속으로 처박히는 얼굴
할머니가 죽은 게 사월이었나,
사월
그리고 사 월
물어볼 사람이 없다
당신과 나를 아는 사람은 모두 죽거나
죽은 것보다 멀리 있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
라고 말한 사람은 여기에 없다
만우절에 죽었다 그의 등,
얼굴,
미소를
구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과 늙음과 슬픔
셋 중 무엇이 힘이 셀까
저울로 들고 오는데
힘은 무게가 아니다
힘은 들어볼 수 없다
재봉틀 앞에 앉아 있고 싶다
무엇도 꿰매지 않으면서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면
구겨진 옷을 내밀고
문을 닫겠다
당신은 내 앞에 내려앉은 한 벌의 옷
사랑한 건 농담이었어
당신이 변명하면
깨진 이마 같은 걸 그려볼 것이다
웃을게요 나는,
웃음을 굽겠습니다
-전문, 『문학동네』, 2021-여름호
▶ 사월四月/死月의 통각을 짚어내다(발췌)_김효숙/ 문학평론가
어떤 이는 사월에 사랑의 방식에 의문을 가지면서 해체놀이를 벌인다. 인물들은 우발적으로 엮여 있고, 기표들은 일상과 거리가 있으며, 재봉틀과 오븐의 기능도 휴지 상태다. 완제품이어서 더 개선하거나 개량할 여지가 없는 이 기계들은 사랑의 기능이 정지된 사람처럼 놓여 있다. 이 시를 읽으면서 우선 생활공간에 구비해 두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재봉틀, 그리고 빵을 구워 파는 어느 가게의 오븐부터 상상해야 한다. 깁는 일과 굽는 일에서 해방된 오브제인 "재봉틀과 오븐"을 두고 화자와 "누가"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이질적인 기능을 장착한 이 기구들에서 인과성을 찾을 수 없고, 단지 '···을 하고 싶거나' '···하고 싶지 않은' 화자의 의지만 드러난다. 게다가 화자는 이 기구들의 기능과 상관없는 "사랑과 늙음과 슬픔"의 무게를 측정하고 싶어 한다. "사랑을 위해선 힘이 필요해"라고 '그'가 말해줬던 것이고, 거기에 필요한 힘이 대체 무엇인지 재고 싶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힘이라는 것이 물리력이기보다 '역능'이라는 데서 반전이 생긴다. 기계가 가진 '힘' 같은 것이 아닌,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사랑은 의미가 있다는 것을 화자는 알고 있다. 만우절에 그가 죽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는 마당이라 그가 선포한 사랑의 의미를 분별하기란 어렵다. '그'가 만우절에 죽었다는 진술은, 그의 죽음이 그날 하루만 용인하는 거짓말 같은 사건이었노라고 말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사월/ 그리고 사 월"이라고 쓴 것처럼, 찬란한 계절과 죽음은 서로 침투하면서 용해된다.
하지만 화자는 사랑의 불가능성을 성토하려는 의도는 없다. 사랑을 말하려면 무게의 강박에서 해방되라고 말한다. 꿰매는 일과 굽는 일을 잘하는 재봉틀과 오븐처럼, 사랑도 상대방을 위해 무언가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만 사랑인 것이다. 하여 화자는 사랑의 수행 방식과 그 강박에 대해 적극 의심해보고 있다. "무엇도 꿰매지 않"는 재봉틀 앞에 망연히 앉아 있는 자처럼, "누가 빵을 사러 가자고 노크"하자 구겨진 옷가지만 허언처럼 내밀면서 정작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알맹이를 텅 비워버릴 수는 없을지 생각해 본다. 이 기구들 앞에 앉으면 기능에 걸맞는 행위를 해야 한다는 강령은 교과서 같은 도덕이다. 하고자 하는 의지와 열망을 가질 때만이 화자의 가사노동은, 나아가 사랑작업은 윤리의 자리로 내려온다. '당신'이 먼저 그것을 실행했지 않은가. 사랑이 농담 같은 것이었다고 말하면서 당신은 모든 진지하고 무겁고 심각한 약속들로부터 해방을 꾀했다. 때문에 화자도 이마를 짚으며 심각해질 필요 없이 사랑을 정의하는 당신의 농담과 변명 앞에서 가볍게 웃을 수 있다. 무게를 강압하는 것들과, 농담처럼 가벼운 것들 중 어느 쪽이 사랑인가라는 질문에는 따라서 '진정한' 같은 수사를 달아놓을 수 없다. 재봉틀은 꿰매고 오븐은 굽는 것처럼 사랑도 '하는' 것이다. 늙는 일이 슬프다는 자는 사랑을 하는 데도 힘이 필요하다고 보지만, 사랑의 역능을 믿는 자는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 안에서 사랑을 이어간다. 꿰맬 수 있는 능력과 구울 수 있는 능력을 가동할 때에만 기구인 것처럼 사랑도 역시 그렇다. 사랑은 '하는' 것이다. (p. 시 383-385/ 론 385-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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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효숙 문학평론집 『눈물 없는 얼굴』 2022. 10. 18 <상상인> 펴냄
* 김효숙/ 제주도 출생, 2017년 ⟪서울신문⟫으로 평론 부문 등단, 평론집『소음과 소리의 형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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