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예지의 어제와 오늘(부분)
이승하
이 땅에서 최초로 나온 종합지(잡지)는 1908년 11월 1일에 발간된 『소년』이지만 문학작품을 실은 '문예지'의 효시는 1919년 2월 1일자로 창간된 『창조』다. 일본에 같은 시기에 유학을 가 있던 김동인 · 주요한 · 전영택이 중심이 되어 도쿄에서 『창조』를 편집하였고 요코하마에서 인쇄 · 발간하였다. 제2호도 일본에서 나왔고 제3호부터 비로소 경성에서 발간하였다. 최남선의 신체시 「해에게서 소년에게」가 『소년』 창간호 권두에, 주요한의 자유시 「불놀이」가 『창조』 창간호 권두에 실리는데, 우리 문학사의 크나큰 사건이었다. (이견이 있기는 하지만) 최초의 신체시, 최초의 자유시였기 때문이다. 두 책자에 실린 시는 우리 문학사 전개 과정상 엄청난 혁명이었고 근대시의 역사가 이로써 시작되었다. 문예지의 역사 103년이 되는 이 시점에 한국 문예지의 어제를 대략적으로 살펴본다. (p. 200 ~)
1919년에 일어난 만세운동은 일본의 식민지 정책을 바꾸게 된다. 10년 동안 실시했던 가혹한 무단정치는 언론 · 출판의 자유를 빼앗아 우리는 신문도 발행하지 못했고 출판사도 가동하지 못했다. 일제가 1919년 8월에 사이코 마코토(薺藤實)를 새 총독으로 파견하면서 문화정치로 정책의 기조를 바꾸자 비로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창간되었고 잡지 『개벽』(1920), 『신천지』(1921), 『신생활』(1922), 『동명』(1922), 『조선지광』(1922) 『동광』(1926), 『현대평론』(1927), 『신동아』(1931), 『중앙』(1933), 『조광』(1935) 등이 연이어 창간되었고 문학작품도 실어줌으로써 창작이 물꼬가 트이게 된다. 『창조』에 이어 나온 『폐허』(1920), 『장미촌』(1921), 『백조』(1922), 『금성』(1923) 등은 말 그대로 동인들이 모여서 펴낸 동인지이면서 문예지를 겸하였다.
1926년에 창간된 『문예운동』, 1927년 11월에 창간된 『예술운동』, 1929년 5월에 창간된 『조선문예』는 다 카프(KAPE)와 관계가 있는 문예지였다. 3호를 낸 『문예운동』의 필진 김기진 · 이기영 · 최서해 · 조명희 · 김복진 등은 카프의 발기인이 된다. 『예술운동』은 카프의 기관지인데 검열 문제로 서울에서 발행을 못 하고 동경에서 발행하였다. 박영희의 「무산계급 문예운동의 정치적 역할」, 이북만의 평론 「예술운동의 방향전환론은 과연 진정한 방향전환이었던가?」, 임화의 시, 송영의 보고서 등이 실렸다. 『조선문예』는 박영희가 주축 멤버였다. 송영의 희곡, 김기진의 문예시평 「단편서사시의 길로」, 한설야의 수필, 임화의 시 등이 실렸다. 이들 세 문예지의 발간이 중단된 것은 일제가 1931년, 1934년 두 차례에 걸쳐 카프의 회원을 대대적으로 검거함으로써 사회주의문학 노선이 조선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p. 200-201 ~)
이런 와중에 이광수가 주재하고 방인근이 자금을 댄 『조선문단』이 1924년 10월 1일자로 창간된다. 그때까지 나온 문예지는 문학청년들이 의기투합해서 만들어낸 동인지 성격이었다. 『조선문단』은 최초의 범문단적인 문예지로서 순수문학 내지는 민족문학을 표방했지만, 김기진의 「문예사상과 사회사상」과 박영희의 「문예비평의 형식파괴와 맑스주의」 같은 평론도 실어 균형감각을 갖추었다. 초판 1,500부가 매진되어 1,500부를 더 찍었는데 이것도 매진될 만큼 인기를 누렸다. 1936년 6월까지 통권 26호를 냈다. 『조선문단』은 신인추천제를 두어 최서혜 · 채만식 · 안수길 · 계용묵 · 한설야 등이 이곳에서 등단했다. 김동인의 「감자」, 전영택의 「화수분」, 현진건의 「B사감과 러브레터」, 최서해의 「탈출기」, 나도향의 「물레방아」가 『조선문단』에 실렸다. 유치환의 「깃발」과 최남선의 기행문 「금강예찬」의 발표지면도 이곳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30년대 중반까지 10년은 카프의 시대이기도 했지만 『조선문단』의 시대이기도 했다.
『조선문단』이 방인근이 계속 돈을 댈 수 없어서 나오지 않자 이를 대체할 문예지가 나오기를 다들 갈망했는데 이에 부응한 것이 『문장』이다. 1939년 2월 1일자로 창간하여 1941년 4월 통권 26호까지 나왔다. 편집주간은 이태준이었다. 『인문평론』은 1939년 10월 1일자로 창간되어 1941년 4월 통권 16호까지 나왔다. 편집주간은 최재서였다. 『문장』이 창작품을 주로 실었던 데 반해 『인문평론』은 평론 게재와 해외 문학 소개에 중점을 두었다. 쌍벽을 이룬 두 문예지 모두 같은 시기에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되었다. 일제는 1936년부터 우리 민족의 말과 정신을 말살시켜 나갔는데, 두 문예지가 우리말과 얼을 지키는 파수꾼이었기 때문이다. 『문장』 26호와 『인문평론』 16호가 한글 말살 정책의 불화살과 사상검열의 그물망을 뚫고 간행되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었다. 5일 만에 초판이 매진되는 성황 속에 『문장』은 이 땅 문예지의 긍지를 지켜나갔다. 통권 26호 중 제7호는 32명 소설가의 소설만, 제24호는 34명 소설가의 소설만 싣는 특집호로 만들었다. 추천제를 통해 좋은 신인을 문단에 내보낸 것도 『문장』의 공이었다. 선고위원 이태준이 추천한 소설가는 최태웅 · 곽하신 · 임옥인 · 지하련 · 허민 · 임서하 등이었고 선고위원 정지용이 추천한 시인은 훗날 『청록집』을 내는 조지훈 · 박두진 · 박목월과 김종한 · 이한직 · 박남수 등이었다. 친일파로 돌아선 최재서 때문에 『인문평론』의 권두언은 매호 친일 발언 일색이었다. (p. 201-202 ~)
일제는 『문장』과 『인문평론』과 『신세기』를 지목, 통폐합하여 절반은 한글로 절반은 일어로 찍으라고 강요했다. 이에 대해 『문장』과 『신세기』는 자진 폐간을 선언했고 『인문평론』은 제호를 바꿀 테니 계속 낼 수 있게 해달라고 총독부에 간청하여 나온 것이 『국민문학』이다.
광복이 되자 막혔던 언로가 한꺼번에 터뜨려져 엄청난 종의 잡지가 나온다. 36년 동안의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난 이 땅의 언론인과 문인은 한국전쟁 발발 이전까지 100종이 넘는 잡지를 발간하였다. 이 무렵에 나온 잡지들의 문제점은 지질이 아주 나빴고 내용이 빈약했으며 부피 또한 얇았다는 것이다, 의욕은 앞섰지만, 종이를 구하기 어려웠고 의욕만 앞서 졸속으로 만드는 것이 다반사였다. 1945년 11월 1일에 창간된 대중잡지 『선봉』을 필두로 하여 엄청나게 나온 잡지 중에는 절반 이상이 창간호가 종간호였다. 이 가운데 『백민』『민성』『신천지』『신태양』『문예』『사상계』 등이 인기를 끌었다.
『문예』는 1948년 8월 1일자로 창간된 문예지로서 한국전쟁 중에는 제대로 못 내다가 1954년 3월, 통권 21호로 종간되었다. 발행인이 모윤숙, 편집인이 김동리, 조연현이 편집장으로 남한 문단의 총 집결지 같은 문예지였다. 1954년 4월에 『문학예술』이, 1955년 1월에 『현대문학』이, 1956년 6월에 『자유문학』이 창간되었다. 모두 월간이었고 순수문학을 지향하였고 세 문예지에 관여한 이들이 1961년 12월에 한국문인협회를 창립하게 된다. 『문학예술』이 1957년 12월에, 『자유문학』이 1963년 4월에 종간호를 내면서 사라졌지만 『현대문학』은 순수문학의 아성을 지키면서 60~70년대에 한국 문예지의 대표주자가 된다. 문인들의 작품 발표 창구 역할을 꾸준히 했지만, 특히 '추천제'를 잘 활용하여 권위를 지켜나갔다. (p. 203 ~)
1968년 당시 문협 이사장으로 있던 김동리는 11월에 전국문인대회를 개최하고 문인협회 기관지인 『월간문학』을 창간하였다.
1972년 10월호를 창간호로 낸 『문학사상』은 1985년 12월, 체제가 완전히 바뀔 때까지 이어령이 경영과 편집을 도맡아서 했다. 책의 표지를 문인의 초상화로 한 특징은 오랫동안 이어졌으며, 1985년 말까지 이어진 이어령의 권두 칼럼도 특색이 있었다. 자료조사연구실을 두어 300편에 이르는 고전문학 자료를 발굴해낸 점은 우리 문학사의 보완을 위해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만하다. 시간(고전문학과 현대문학)과 공간(한국문학과 세계문학)을 초월하려는 『문학사상』의 노력은 짧은 기간 내에 부수를 현저히 늘려 전통의 문예지 『현대문학』와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되었다.
시 전문 월간지도 다수 창간되었다. 문덕수가 1965년 4월에 창간했다 20호를 내고 조연현에게 편집권을 넘겼던(현대문학사에서 23호까지 발행) 『시문학』이 문덕수에 의해 재창간되었다. 해외 시단의 소식을 전하고 해외 유명 시인의 시 세계를 소개하는 일, 한국시의 해외 소개에 주력한 점을 높이 살 만했다. 한편 1969년 5월 전봉건이 주재하여 『현대시학』이 창간되었다. 해외 시단의 소식을 전하고 해외 유명시인의 시 세계를 소개하는 일, 한국시의 해외 소개에 주력한 점을 높이 살 만했다. 한편 1969년 5월 전봉건이 주재하여 『현대시학』이 창간되었다. 전봉건 사후 정진규 시인이 30년을 이끌었고, 2014년부터는 편집권을 전봉건 시인의 자제가 회수하여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60년대 말에 동인지 성격으로 등장한 『시인』은 이장근이 편집과 발행을 맡았는데, 70년대에 들어 조태일이 편집장이 된 이후 면모를 일신하였다. 김지하와 양성우를 문단에 내보낸 문예지로 유명해진 『시인』은 진보적 성향의 시 전문 월간지로서 이가림 · 김준태 · 박정만 등의 시인과 구중서 · 김봉걸 등의 평론가가 주요 필진이었다. (p. 203-204 ~)
1973년 10월에 박목월이 편집인과 발행인을 겸해 창간한 『心象』에는 박남수 · 김종길 · 이형기 · 김광림 등의 지인이 참여하였다. 박목월의 사후에는 아들 박동규가 오늘날까지 결호 없이 내고 있다. 시전문 월간지는 『心象』의 등장으로 『시문학』 『현대시학』과 삼각구도를 갖춰 시인들의 활동 무대가 대폭 넓어졌다.
1961년 5월 16일에 발발한 쿠데타는 4·19혁명의 감격을 일시에 무너지게 했고, 국민의 민주화를 위한 열망에도 찬물을 끼얹었다. 민주화를 위한 열망만 있었지 민주주의를 살천한 경험이 없었던 대다수 국민들에게 '혁명 공약'이니 '국가 재건'이니 '민정 복귀'니 하는 쿠데타 세력의 말은 달콤한 솜사탕의 역할을 하였다. 쿠데타의 주력은 국가재건비상조치법과 부정축재처리법을 공포하여 분위기를 잡은 뒤 개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쳐 78.78%의 압도적인 찬성표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박정희는 육군 소장에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으로 변신한 뒤 대통령 권한대행을 거쳐 1963년 10월 15일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제3공화국의 문을 열었다. 혁명 직후에 분출한 민중의 다양한 요구가 불러온 사회의 혼란이 쿠데타 세력에게 거사의 기회를 제공한 탓에 제3공화국의 탄생은 비교적 쉽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와 국민이 곧바로 재건의 깃발 아래 손잡고 모여 일로매진하지는 않았다. 1963년의 4대 의혹 사건과 1964년의 삼분폭리사건 및 1966년의 한국비료헌납사건은 제3공화국이 부정축재자들을 제대로 처벌하고 부정부패의 사슬을 완전히 끊은 뒤, 오로지 '혁명'의 정신에 입각하여 출범한 것인가에 대해 의구심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아울러 1964년 6·3사태와 언론 파동 및 인혁당사건은 스스로 이름 붙인 '5·16혁명'의 순수성에 금이 가게 했다. (p. 204-205 ~)
이러한 60년대 전반기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전통적 서정의 테두리 안에 머물러 있던 많은 문학인에게 자성을 촉구하였다. 문학인들은 4·19 직후에는 시민이 이룩한 혁명의 터전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의 문제로 고민하였고, 쿠데타 이후 사회가 차츰 경색국면으로 접어들자 문학의 현실참여에 대해 새롭게 생각하게 되었다. 온건한 서정의 테두리 안에 계속 머물고자 한 문학인의 수가 여전히 많았지만 4·19혁명이 불러일으킨 변혁의 기운은 한국문인협회가 큰 세력권을 형성하고 있던 기존의 문단에 일대 충격을 줄 용틀임을 하고 있었다.
1966년에 창간호를 낸 최초의 문학 계간지 『창작과비평』이 그 역할을 하였다. 백낙청은 계간지를 편집하면서 기존의 문예지와는 변별되는 몇 가지를 고집하여 눈길을 끌었다. 창간호부터 가로쓰기에 한자의 괄호 처리, 사진과 삽화의 배제(대담을 한 이들의 사진을 잡지에 넣는 것은 70년대도 중반에 가서부터였다). 사회 · 역사 비평문의 게재, 외국 문학이론의 번역 소개, 문학뿐 아니라 다양한 인문과학서와 사회과학서에 대한 서평 게재는 이전의 문예지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요소였다. 쪽수가 한 해 동안 계속 이어지는 식의 편집과 그 호의 대표 작품과 저자의 이름을 표지에 등장시킨 것도 국내에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신인상 제도를 따로 마련하지 않고 작품을 실어줌으로써 바로 등단시키는 것도 획기적인 일이었으며, 장편의 집중분재 후 단행본으로 출간하는 것도 기존의 월간지에서는 하지 못했던 일이다. 『창작과비평』은 자타가 공인하는 우리나라 계간지의 선구자였다. 이는 시기적으로 제일 먼저 나왔기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점들이 훗날 출간되는 계간지들에게 전범으로 작용하였기 때문이다. (p. 205-206 ~)
문단의 판도 변화는 1970년에 창간된 또 하나의 계간지 『문학과지성』에 의해 이루어졌다. 적어도 70년대 전반기 몇 해 동안은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 문학관에 있어서 큰 차이가 없어 보인다. 그 이유는 혈기왕성한 젊은 나이에 4·19혁명의 감격을 몸으로 체험했거나 눈으로 확인했다는, 상황에 대한 공감대가 뚜렷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창간호를 준비하면서 김병익 · 김치수 · 김현 세 사람은 『문학과지성』의 특색을 재수록 제도를 통해 확보하려고 했다.
70년대의 문단에서 두 계간지는 외국 문학 이론의 소개와 적용, 작품의 선정과 평가에 있어 다른 문예지를 압도하는 '힘'을 갖고 있었다.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이 1980년에 '신군부'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등장한 정치 권력에 의해 강제로 폐간되기 전까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평론가들이 편집하는 일종의 동인지 체제였기 때문이다. 창간동인 3인의 친구인 김주연은 6호부터 참가하였다. 이들 4명은 『문학과지성』을 이끈 편집동인으로서 세칭 '문지 4K'였다.
『창작과비평』은 백낙청이 중심이 되어 시민문학론에서 출발, 민족문학론 · 민중문학론 · 농민문학론 · 제3세계문학론 등으로 논리를 확산시켜 나갔다. 한편 『문학과지성』은 정신분석비평 · 구조주의 · 기호학 · 문학상상력 · 문학사회학 등 서구의 문학이론을 성실히 소개하면서 이들의 한국문학에의 적응을 진지하게 모색하였다. 전자가 아놀드 하우저와 C.W. 밀즈를 소개한 반면 후자는 바슐라르와 골드만을 소개하였다. 전자가 서구 사실주의 작가들을 신뢰한 반면 후자는 누보로망 계열의 작가들을 선호하였다. 요컨대 『창작과비평』은 이 사회가 안고 있는 제반 현실 문제에 큰 관심을 보였다. 근대화 과정에서 희생양이 된 노동자와 농민에 대해 애정어린 시선을 보내는 한편, 정치현실의 부조리한 상황과 물질적 소외에 대한 항변을 자주 작품의 소재와 주제로 삼았다. 반면 『문학과지성』은 문학에 있어서 순수성과 정신의 자유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했다. 그래서 문학의 형식미학적 측면을 중요하게 다뤘으며, 현대문명이 야기한 잡다한 문제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인간 내면의 부조리함, 지식인의 정신적 소외 현상 등을 즐겨 다루었다. (p. 206-207 ~)
제5공화국은 밀실에서 신군부 세력의 모의로 탄생하였기에 정당성이 전무하였다. 이 정권의 탄생과 광주민주화운동의 무력진압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언론인과 문학인이 있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제5공화국 정권은 언론사 대학살을 감행했으니 바로 '언론통폐합조치'였다. 172개 정기간행물의 등록을 취소함으로써 『씨알의 소리』『뿌리 깊은 나무』『창작과비평』『문학과지성』 등 유력지들이 폐간되었다.
1970년대 문학을 이끌던 잡지들이 강제로 폐간되어 한국문학 전반에 걸쳐 정권의 검열이나 통제 없이 자유가 보장되는 작품의 발표 매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 무크지였다.
'무크'는 잡지(magazine)와 단행본(book)의 합성어다. 정상적인 출판이 불가능한 시점에서 강한 현장성과 기동성, 문화 게릴라적 성격이 무크지 전성시대를 열었다. 1980년대는 무크지 전성시대라 할 정도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무크지가 만들어졌으며 1980년대 초·중반 한국문학의 중심을 이루었다. 한국에서 무크지 시대를 연 『실천문학』은 '민중의 최전선에서 새 시대의 문학운동을 실천하는 부정기간행물(MOOK) 창간호'라는 표제를 달고, 1979년 하반기에 기획되어 1980년 3월에 발간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우리 세대(시대)의 문학』 『언어의 세계』『지평』『삶의 문학』『문학의 시대』『여성』『전망』『민족현실과 지역운동』『정통문학』『우리문학』 『문학예술운동』『민족과 지역』『노동문학』『현대시사상』등 무크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렇듯 1980년대 초·중반 한국문학의 중심을 형성하던 무크지 문학은 6˙29선언 이후 정기간행물에 대한 검열과 통제가 약화되고 『창작과비평』『문학과사회』등 정기간행물이 재간행되면서 서서히 사라졌다. (p. 207-208 ~)
70년대 내내 『창작과비평』과 『문학과지성』은 문단에서 강력한 힘을 발휘하였다. 편집진의 편집권은 문화권력이요, 어느 집단이 권력을 오래 누리다 보면 부작용도 생겨나는 법이다.두 계간지의 끝 모를 세력 확장에 우리의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창간 이래 소수의 평론가가 이끄는 일종의 동인지 체제를 좀체 벗어나지 않아서인지 두 계간지의 '오만과 편견'과 파당성을 지적하는 사람들도 나타났다. 그리하여 기회를 포착하여 도전장을 낸 두 계간지가 있었으니, 1976년 가을호를 창간호로 삼은 『세계의문학』과 1978년 봄호를 창간호로 삼은 『문예중앙』이다.
『세계의문학』은 김우창과 유종호의 책임편집체제로 출발했는데, 국내외의 좋은 문학작품과 인문과학 분야의 논문 및 서평을 광범위하게 싣는 것은 기존의 계간지와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것이었다. 창간하자마자 시작한 '오늘의 작가상' 공모로 한수산 · 박영한 · 이문열 등을 일거에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려놓았고, 해외 번역소설 수록과 오늘의 세계문학 소개는 다른 계간지와 변별되는 새로운 모색이었다.
최종률 · 홍사중 · 구중서가 차례로 편집인이 된 『문예중앙』은 신문사에서 발행한 문예지여서 그런지 편집상의 모험을 시도하거나 거창한 이슈를 내걸지 않아 기존의 계간지나 월간지와 특별히 다른 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80년대에 들어서도 계속 고전을 했지만 훌륭한 작품을 싣고 좋은 신인을 찾아보자는 문예지 본연의 임무에는 충실하였다.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 기관지 『실천문학』은 비상게엄하였던 1980년 3월, 무크지로 출발했다. 1984년 이문구가 사장, 송기원이 편집주간으로 취임하였다. 1985년 계간지로 전환했지만 1985년 『민중교육』 사건으로 강제 폐간되었다가 1988년 봄 속간되었다. 1995년 상시적인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주식회사로 전환하였다. 창간호부터 문학의 현실비판, 현실참여, 민족·민중문학을 지향하였다. (p. 208-209 ~)
이동하 · 최승호를 책임편집자로 삼아 1989년 여름호를 창간호로 낸 『작가세계』는 출판사 세계사가 낸 계간지다. 어느 한 소설가나 시인, 평론가를 집중 조명하는 특집을 전면에 내세운 『작가세계』는 신인 발굴에도 신경을 썼다. '세계사시인선'과 함께 모던한 작품 경향을 이끌어 갔는데 2000년에 들어 판매부수가 떨어지고 장편소설을 공모한 '작가세계 작상'이 주목을 못 받자 2017년에 112호를 마지막으로 발간이 중단되었다. 『세계의문학』과 『문예중앙』도 시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 비슷한 시기에 휴간에 들어가는데 재출간은 어려울 듯하다. 이수화학에서 내던 종합문예지 『21세기문학』이 81호로 휴간에 들어갔다.
21세기로 접어들면서 문예지들이 수난을 겪게 된다. 독자는 활자보가 영상을 즐겨 보게 되었다. 사람들은 어디에 가도 휴대폰, 스마트폰을 들고 있지 책을 들고 있지 않다. 21세기에 들어와 시전문 계간지 『시안』『시인세계』『시평』『문학 선』『시와표현』이 폐간했다. 더 일찍 1990년대부터 『소설문학』『현대시사상』『현대시세계』 『외국문학』『문학과경계』『한길문학』『상상』『문학정신』『정신과표현』『문학수첩』『서시』『문학인』『문학판』『파라21』같은 문예지들이 사라졌다. e-book 시장의 성장, 웹툰과 웹소설 독자의 증가, 작은 화면으로 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 인터넷게임 시장의 성장 등에 힘입어 사람들은 화면을 보는 시간이 늘어났고 그에 반비례해 책 읽는 시간은 줄어들고 있는 것이 가장 큰 이유다. (p. 209-210 ~)
이러한 온갖 악조건 아래서 지방에서 문예지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는 것은 기적적인 일이다. 문예지는 (확언할 수는 없지만) 적자를 내게 마련이다. 제작비와 원고료 지급에 매호 수백만 원은 들어갈 테니 한 호 낼 때마다 적자가 누적되고 결국 그 적자는 문예지 편집자의 목을 조인다. 군소 서점에서 취급하지 않는 두 가지 책이 바로 문예지와 시집이라고 한다. 우리나라는 중앙과 지방의 간극이 너무나 크다. 서울의 유수 문예지에서는 지방신문사가 공모한 신춘문예 당선자의 신작은 실어주지 않는다. 그 이유는 등단한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방에서 나오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사람 또한 중앙문단에서는 잘 받아주지 않기 때문에 다시금 등단하기 위해 고투한다. 이런 환경 아래서도 문예지를, 그것도 지방에서 내고 있는 분들에게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든 어디든 간에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텐데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유수 기업체로부터 1년 홍보비의 1천 분의 1만 지원받아도 지방 문예지들은 숨통이 트일 것이다.
매호 기획도 알차고 좋은 작품을 싣는 지방의 문예지는 너무 많아 거론하기도 어렵다. 그중 인천작가회의 출판부의 『작가들』은 올해 여름호로 81호를 냈다. 인천의 『학산문학』이 116호, 『리토피아』가 86호, 전주의 『문예연구』가 113호를 냈다. 대전의 『애지』가 90호를, 『시와정신』이 80호를 냈다. 청주의 『딩아돌하』도 62호를 냈다. 대구의 『시와반시』가 120호를 냈다. 부산의 『오늘의문예비평』이 125호를, 『시와사상』이 113호를, 『신생』이 91호를 냈다. 제주의 『다층』이 94호를 냈다. 지역의 문화예술위원회에서 별도의 기금을 마련해서라도 그 지역의 대표적인 문예지를 지정, 지원을 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한국문화의 서울 쏠림은 마땅히 지양되어야 한다. (p. 210-211 ~)
근년에 들어 문학독립잡지들이 나오고 있다. 『시인보호구역』『영향력』『펄프』『쓺 문학의 이름으로』『무명』『공통점』 등은 소수의 편집자가 주머니를 털어 만들기도 하고 동인체제로 운영되기도 한다. 기존으 출판 질서를 무시하고 게릴라식으로 만드는데 판매량은 많지 않아 보인다. 이들이 '영향력'을 발휘하려면 독자를 확보해야 하는데 아직은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중이다. 판형과 편집에서 새로은 시도를 하고 힜는 문예지로는 『시마』(이도훈)와 『상상인』(염창권), 『상징학연구소』(변의수)를 꼽을 수 있다. 이 세 문예지의 참신성이 신선하기는 하지만 새로운 바람을 물러일으키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인터넷 시대에 발빠르게 적응한 웹진이 있다. 온라인으로 발행하므로 지가 인상이나 발송 비용 발생과는 무관한 문학잡지다. ⟪문학광장⟫ ⟪문장웹진⟫ ⟪시인광장⟫ ⟪비유⟫ ⟪노블⟫ ⟪한반도문학⟫ ⟪거울⟫ 등이 선전하고 있는 중이다.
문예지는 계속 나와야 그 값어치가 지속된다. 문예지가 폐간되면 그때까지 애써 낸 것들은 후속 분예지의 부재로 인해 그 값어치가 빠른 속도로 하락한다. 애써 만든 책이 휴지가 되고 마는 것이다. 오늘날 독자는 책을 읽지 않고 컴퓨터 화면을 보거나 스마트폰 화면을 보고 있다. 글자를 보더라도 종이에 인쇄된 글자를 보지 않고 화면의 불빛이 비춰부는 글자를 보고 있다. 1919년부터 2022년까지 103년 동안 우리는 무자비한 정치적인 탄압 속에서 문학을 응전의 논리로 채택해 글을 쓰고 그 글을 읽었는데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 그전적인 문예지가 과연 계속 나올 것인가? 그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다. ▩ (p. 211-212-終)
* 이 글은 문예지 탄생 100주년을 맞아 『문학사상』 2020년 1월호에 발표한 「한국정치사에 발을 만춘 한국 문예지의 100년 역사」를 대폭 수정 · 보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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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와산문』 2022-가을(115)호 <기획특집 ① / 한국 문예지의 어제와 오늘>에서
* 이승하/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 시집『공포와 전율의 나날』『생애를 낭송하다』『예수 · 폭력』등, 산문집『시가 있는 편지』『꿈꾸듯 미치도록 뜨겁게』등, 평전『마지막 선비 최익현』『진정한 자유인 공초 오상순』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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