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절한 아들 묘에서 곡한 김수항
조해훈/ 시인, 고전평론가
12월 26일 새벽에 아들 묘에서 곡하다
(十二月二十六日曉 哭兒墓 · 십이월이십육일효 곡아묘)
그믐달 드문 별빛이 새벽 구름 비치는데(缺月疏星映曙雲 · 결월소성영서운)
빈산에 쌓인 눈은 외로운 무덤 덮고 있네.(空山積雪掩孤憤 · 공산적설엄고분)
평생의 지극한 슬픔을 오늘 밤 통곡하니(百年至慟今宵哭 · 백년지통금소곡)
지하의 영혼은 듣고 있는가.(能見精靈地底聞 · 능견정령지저문)
위 시는 김수항(金壽恒 · 1629-1689, 60세)의 작품으로, 그의 문집인 『문곡집文谷集』 권6에 수록돼 있다.
문곡 김수항은 조선 숙종 때 영의정을 지냈던 분이다. 병자호란 때 척화를 강력하게 주장했던 김상헌의 손자다. 김수항은 위로 김수증金壽增 · 김수홍金壽興 두 형을 두었는데 이들 삼형제는 '삼수三壽로 불렸다. 그런 김수항이 여섯째 아들 김창립(金昌立 · 1666-1683) 요절하자 그 무덤 앞에서 곡을 하면서 시를 읊은 것이다.
김수항의 여섯 아들은 김창집金昌集 · 김창협金昌協 · 김창흡金昌翕 · 김창업金昌業 · 김창즙金昌楫 · 김창립金昌立이다. 모두 학문과 문장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당시 세간에서 이들 형제를 부러워하며, '육창六昌으로 불렀다. 그 중 김창립은 막내아들인데, 제대로 뜻을 펴보지도 못한 채 18세에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던 것이다.
김수항은 당시 영의정 신분인데다 자식을 앞서 보낸 아버지여서 장지인 경기도 양주楊州의 석실石室까지 따라가지 못했다. 그리하여 가슴은 더 무너져 내렸던 것이다.
같은 문집 권6에는 이듬해 8월 잃은 아들 김창립의 생일에 지은 시가 실려 있고, 권22에는 죽은 아이의 행장이, 권24에는 대상大喪 때까지 지은 제문 5편이 실려 있다. 이로 볼 때 당시 김수항의 안타까움이 얼마나 절절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김창립의 형인 김창협이 지은 묘지명을 보면, 1689년 김수항이 죽음을 맞이하던 날 "네 아우(김창립)의 묘지墓誌를 내가 오래전부터 짓고 싶었으나 슬픔이 너무 심해 문장을 만들 수 없었다. 이제 나는 끝이니, 네가 꼭 묘지를 지어라."라고 유언을 했다고 한다. 아들 김창립이 죽고 6년이 흐른 뒤 김수항은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면서도 끝내 요절한 막내아들을 잊지 못했던 것이다.
위의 시를 지은 12월 26일은 바로 그 아들 김창립의 기일이었다. 김수항은 당시 장지에 가지 못하였다. 그러고 보면 위의 시는 다음 해 기일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p. 312-313)
김수항은 1675년(숙종 1)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나 윤휴 · 허적 · 허목 등의 공격으로 관직이 삭탈되고, 원주에 유배되었디. 이듬해 풀려나왔다가 다시 전라도 영암 구림으로 이배되었다. 1680년 영의정에 올랐고, 1681년『현종실록』 편찬 총재관을 지냈으며,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집권하게 되자 전라도 진도에 유배된 후 사사賜死된 것이다. (p.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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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펀』 2023-봄(28)호 <조해훈 시인의 한시로 읽는 역사 이야기 ⑬> 에서
* 조해훈/ 시인, 고전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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