묏버들 가려 꺽어/ 묏버들 갈해 것거
홍랑
묏버들 갈해 것거 보내노라 님의 손대
산버들 가려 꺾어 님에게 보내노라
자시는 창밧긔 심거두고 보소서
주무시는 창窓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닙곳나거든 날인가도 너기소서
밤비에 새닙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 전문 (p. 235)
* 블로그주: PC에서 옛 한글체가 불가하므로 원본은 책에서 일독 要.
【배경】
이 작품의 주인공은 지방 벼슬아치와 기생이다. 선조 6년(1573년) 가을 어느 날, 당시 삼당시三唐詩人 또는 팔문장八文章으로 불리던 최경창崔慶昌이 북도평사北道評事로 경성에 갔을 때, 함경도 홍원 관아 객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엮여지는데, 그 상대자는 홍원 관아 기생인 홍랑洪娘이었다. 그때 홍랑은 나이 열 예닐곱의 갓 피어나는 꽃봉오리였지만, 고죽孤竹 최경창은 34살의 중년이었다. 그러나 이 두사람의 나이차를 가볍게 뛰어넘게 해주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시詩였으며 이후 이 둘은 지상 최대의 지고지순한 사랑을 엮어낸다. 요즘 말로 그야말로 '나이는 숫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홍원 객사에서 하룻밤 사이에 만리장성을 쌓은 고죽과 홍랑, 그러나 선조 7년(1574년)인 이듬해 봄, 고죽은 경성에 부임한 지 6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가야 했다. 홍랑은 차마 헤어지기 싫어서 배웅을 나선다. 함관령(함흥_홍원 간 고개) 넘어 쌍성(영흥)에까지 무려 1300리, 역사상 최장의 배웅길이다. 두 사람은 쌍성 고갯마루에서 작별을 고한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하염없이 걷다 보니 함관령 고갯마루다. 날이 저물고 차가운 빗발까지 뿌린다. 홍랑은 발길을 멈추고 길가 산버들 몇 가지를 꺾는다. 그리고 지필묵을 펼쳐 시조 한 수를 지었다. 이 시조가 바로 유명한 '묏버들' 시조다. 한국문학사상 이보다 아름다운 연시는 없을 것이다.
그 뒤 3년 동안 소식이 끊겼다가 최경창이 병석에 누웠다는 말을 듣고 즉일로 떠나 7주야 만에 상경하였다. 그때 양계(兩界: 평안도 · 함경도)에 금禁함이 있고, 명종비 인순왕후仁順王后가 죽은 탓으로 이것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관직이 면직되고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갔다.
2013년 가을 어느 날 필자는 고죽 내외의 묘와 홍랑이 영면한 음택을 찾아 참배 드린 바 있다.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 교하읍 다율리 산자락에 있다. 고죽 부부의 음택은 묘지의 위쪽에 나란히 자리 잡고 있었고 홍랑의 음택은 두 분의 음택 아래쪽에 모셔져 있었다. 전해 오는 말을 빌리면, 홍랑이 비록 천한 신분이기는 하였으나 고죽이 말년에 병마와 싸울 때 홍랑이 극진히 보살핀 공과 덕을 높이 평가하여 고죽 문중의 결의로 홍랑의 음택을 현재의 그곳으로 모셨다고 한다. 반상의 신분 제도가 엄격했던 그 시절에는 파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이때 필자는 고죽 내외보다도 홍랑의 음택이 비교적 더 잘 관리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필자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출전은 찾지 못했고 전사본傳寫本에 따랐다. (p. 236~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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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과의식』 2022-가을(128)호 <특별연재_고시조 100수 찾아내기 5>에서
* 김용채/ 시조시인(농민신춘), 문학평론가(문학과의식), 시조집『숭어, 뛰다』, 고시조 선집『고시조 산책 100선』, 장편소설『소설 불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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