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호지
민용태
우리의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것은
이 얇다란 종이 하나
북풍이 칼날을 휘둘러도
우리는 이 창호지 하나를 방패로
겨울을 난다
구름의 포를 뜬 창호지는
그러나 작은 바람결에도 곧잘 약하게 운다
실은 창호지는 눈물에 약하다
작은 눈물바람에도 가슴이 허문다
푸른 하늘에 연이 되고 싶었을까
고명한 선비의 붓 끝에
영생을 얻고 싶었을까
창호지는 연한 풀잎의 힘줄이 드러나 보인다
갈기갈기 찢기울지언정 부서지지는 않는다
차라리 상여 위에 꽃으로 필지언정
그 자리에서 깨어나지 않는다
깨어지기보다는 오히려 깃발이 되어
펄럭이며 소리치는
실은 대기의 사촌쯤 되는
우리네 하얀 마음
너와 나의 등불을 지키는 것도
실은 이 얇다란 창호지 하나다.
-전문-
▶사랑의 돈 끼호떼, 시인 민용태 이야기/ 1968년 『창작과비평』 등단(발췌)_ 이정현/ 시인 · 수필가 · 평론가
시인의 고향은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면 차리 2구이다.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처음으로 존재론적 고독을 알았던 곳이다. 바람의 발, 시냇물 물방울, 맨드라미, 지푸라기 그리고 안방 문고리는 시인의 추억 속에서 그대로일 테지만, 엄니가 담가주시던 막걸리 청주(괴눈깔 동동주)와 김치부침개는 그리움이 된 지 오래다. 그 그리움 곁에 나란히 계신 시인의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말과 일본어로 시를 썼어요."라고 할 정도로 멋쟁이셨다. 갑자기 스페인으로 유학을 떠난다는 아들을 위해 논 3마지기와 소 두 마리를 팔아 준 아버지였다. 평교사로 휘파람 불며 자전거로 40년의 교직 생활을 마친 점이 멋졌다면, 어머니를 일찍 보내고 혼자 남은 인생을 즐겁게 사신 점은 더 멋졌다고 한다. 양복에 백구두를 신고 캬바레에 나타나면 제일 인기 만점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화순 멋쟁이로 83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명성(?)을 누리셨다고 한다. '안방 문고리에는 아직도 "용태 너 오냐?'가/ 청정한 목소리로 붙어 있습니다."처럼 화순 청풍에는 영원히 사는 어머니가 계신다. 고향 품속보다 더 넓은어머니가 하얀 웃음이, 멋쟁이 아버지의 지루박, 탱고의 리듬이 시인과 함께 산다. (p. 시 259-260/ 론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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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현 평론집 『60년대 詩人 깊이 읽기』에서 / 2022. 12. 24. <문학아카데미> 펴냄
* 이정현/ 강원 횡성 출생, 2007년『수필춘추』로 수필 부문 & 2016년『계간문예』로 시 부문 & 2022년『시와편견』으로 평론 부문 등단, 시집『살아가는 즐거움』『춤명상』『풀다』, 시선집『라캉의 여자』, 산문집『내 안에 숨겨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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