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몽돌을 읽어 보다/ 유봉희

검지 정숙자 2022. 12. 28. 22:48

 

    몽돌을 읽어 보다

 

    유봉희(1942-2022, 80세)

 

 

  찰랑이는 물가에서

  돌들은 하나같이 둥글어지고 있었다.

  살아온 내력이 같아서인지

  둥글게 사는 것이 한 생의 목표인지

  누가 그들의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소금기 절은 상처가 제 무늬로 떠오르기까지

  바람과 파도는 얼마나 긴 시간을 치유의 입술이 되었을까

  그 아득한 걸음이 문득 엄숙해져서

  사열대 지나듯 돌밭을 걷다가 돌 하나 집어 들었지

  몸통엔 파낸 듯 알파벳 글자와 흘림한글 철자가

  뒤 암반에는 수사슴  한 마리가 선사시대를 뛰어 넘어오고 있다

 

  아무래도, 어느 멀고 먼 시간에서

  어떤 이가 보낸 메시지인 것만 같아

  마음은 금방 날아오를 날갯짓으로 부풀어 오르지만

  내 어리석음은 바다 깊이로 내려앉아 있고

  나의 지식은 물 위의 살얼음 같아서

  건너갈 수가 없구나

 

  돌의 둥근 모양을 감싸서 눈을 감는다

  다시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먼 듯, 가까운 듯

    -전문(p. 296-297)

 

  ☆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발췌)_ 박제천/ 본지 주간

  유봉희 시인이 영면하셨다. 

  [저의 아내 유봉희 시인이 9월 30일 밤 11시 15분에 영면하였습니다. 항상 사랑하여 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성수 드림]

  유봉희 시인의 부군께서 보내준 이메일이다. (p. 194)

 

  유봉희 시인의 「몽돌을 읽어보다」는 스케일이 큰 시다. 그러면서도 사물의 본질을 상징적으로 고찰할 줄 아는, 다시 말해 시를  한 단계 높게 검출할 줄 아는 시인이다. "찰랑이는 물가에서/ 돌들은 하나같이 둥글어지려 하고 있다./ 살아온 내력이 같아서인지/ 둥글게 하는 것이 한 생의 목표인지/ 누가 그 속내를 들여다 볼 수 있을까" 이 연은 몽돌의 상징을 나타낸 것으로 상징주의에서 일컫는 원환상징圓環象徵을 띠고 있다. 원환상징이란 모든 사물들은 응축하거나 둥글어지려는 경향이 있음을 의미하는데 몽돌과 시적 화자의 살아온 내력과 동일선상에 놓음으로써 일치를 이루고 있음을 본다. 더불어 몽돌 하나에 드러난 문양의 앞면에서 알파벳문자의 흘림체를 보고 뒷면에서는 선사시대를 뛰어넘는 사슴을 보는 것은 문자의 발명과 더불어 시작된 인간 문명의 발달과 아득한 역사까지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서 사물의 앞과 뒤를 두루 살필 줄 아는 시적 안목과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면이 경탄스럽다. (p. 294-295) 

 

  삼가 유봉희 시인의 영면을 빈다. (p. 297) 

 

  # 유봉희 시인(1942~2022. 9. 30.)/ 이화여대 사회학과 졸업. 2002년『문학과창작』으로 등단, 시집『소금화석』『몇만 년의 걸음』『잠깐 사이의 별을 보았다』『세상이 맨발로 지나간다』. 2014년 시인들이 뽑는 시인상 · 2018년 시와정신 해외시인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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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과창작』 2022-겨울(176)호 <유봉희 시인 추모> 에서

  * 박제천/ 본지 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