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수
조지훈(1920~1968, 48세)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러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秋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 종구품正一品 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르량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呼哭하리라.*
-전문 -
* 조지훈, 『조지훈 전집 - 1. 시』, 일지사, 1973, p.1973. p.22. 한자는 모두 한글(한자)로 바꿨다.
▶조지훈은 거꾸로 읽어야 한다(발췌)_정과리/문학평론가
이 시를 전통의 아름다움을 우아하게 빚은 작품으로 읽는 것 자체가 엽기가 아닐까? 그러기에는 너무나 선명하게 전통의 붕괴를 전달하고 있지 않은가? 전통이라는 이름의 건축물에는 이미 인적이 끊기고 새들과 거미가 장악해 버렸다. 전통은 망했다. 그 멸망의 원인도 제시되어 있다. "큰나라 섬기다"가 그리 됐던 것이다. 섬기는 모양까지 제시되었다. 큰나라의 옥좌 위엔 "여의주 희롱하는 쌍룡"이 있지만, 우리는 "쌍룡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그러니까 제목 「봉황수」는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다가 맞이한 파국의 운명을 시름함"이라는 뜻이다. 김도향의 노래대로 "난 참 바보처럼 살았군요"이다. 이건 그냥 환상일 뿐이고, 황홀한 환상도 아니고 초라한 환상일 뿐이다. 게다가 실제 봉황이 운 적도 없었다 . 그러니 모든 게 모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걸은 간 데 없고" 환상이 낳은 사물들만이 남았지만, 이 폐허를 두른 담돌("추석")을 밟고 가는 것조차 치욕스럽다("나의 몸둘 곳은 바이 없었다.") 정말 옛날 세계를 추억한다면, 이는 "구천에 호곡"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 호곡은 옛 세계를 잃어버렸다는 상실감의 울음이 아니라, 그런 어리석은 삶을 산 겨레의 치욕을 슬퍼하는 호곡으로 읽어야 한다.
그러나 마지막 문장 하나의 전환이다. 화자는 울고 싶지만 울음을 참는다. 왜? 두말할 것도 없이 망해 버린 옛날을 고이 보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때 옛날을 이리도 생생하게, 처참하게 묘사하는 것은 그것의 몰락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절차이다. (p. 139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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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2-10월(394)호 <기획 연재 54/ 정과리의 시의 숲속으로>에서
* 정과리/ 문학평론가,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1979년 《동아일보》신춘문예를 통해 평론 활동을 시작, 저서『문학, 존재의 변증법』『스밈과 짜임』『문명의 배꼽』『무덤 속의 마젤란』『들어라 청년들아』『뫼비우스 분면을 떠도는 한국 문학을 위한 안내서』『'한국적 서정'이라는 환幻을 좇아서』등 다수의 평론집, 문명에세이, 연구서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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