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이숭원 비평집_『매혹의 아이콘』/ 새들의 페루 : 신용목

검지 정숙자 2022. 8. 15. 03:07

 

    새들의 페루

 

    신용목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

  죽지에 부리를 묻고

  폭우를 받아 내는 고독, 젖었다 마르는 깃털의 고요가 날개를 키웠으리라 그리고

 

  순간은 운명을 업고 온다

  도심 복판,

  느닷없이 솟구쳐 오르는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

  바람의 위턱과 아래턱,

  풍치의 자국으로 박힌

 

  공중의 검은 과녁, 중심은 어디에나 열려 있다

 

  둥지를 휘감아 도는 회오리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

 

  하늘을 향한 단 한 번의 일격을 노리는 것

  새들이 급소를 찾아 빙빙 돈다

 

  환한 공중의, 캄캄한 숨통을 보여 다오!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그곳을 가격할 수 있다면

 

  일생을 사지 잘린 뿔처럼

  나아가는 데 바쳐도 좋아라,

  그러니 죽음이여

  운명을 방생하라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  느닷없는 검은 봉지가 공중에 묘혈을 파듯

  그곳에 가기 위하여

 

  새는 지붕을 이지 않는다

    -전문, 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창비, 2007. 8.) 

 

 

   유랑의 정신과 슬픔의 육화_신용목(발췌)_ 이숭원/ 문학평론가

  로맹가리의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는다」에서 착상되었을 것 같은 이 시는 고독과 죽음을 소재로 삼고 있다.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페루 인접한 해안가에 온갖 새들이 날아와 죽어 새들의 시체가 즐비하다. 남자들은 새들의 유해 속에서 춤을 추며 향락한다. 거기 자살을 기도하는 한 여인이 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카페 주인이 그녀를 구한다. 그녀에게 희망의 빛을 순간적으로 느끼며 사내는 여인과 사랑을 나눈다. 그러나 다시 허망을 느끼고 그녀는 남편에게 이끌려 사라진다. 해안에는 다시 공허가 찾아온다. 이 소설은 모호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어서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고독과 죽음과 허무를 주제로 삼고 있음은 분명하다. 시인은 이 소설의 뉘앙스를 시로 재현해 보고자 한 것 같다. 그것이 바로 마음의 우러남보다 작품의 제작에 힘을 기울였다는 판단의 근거가 된다.

  「새들의 페루」에서 페루는 죽음을 의미한다. 제목에만 페루가 나올 뿐 시의 본문에는 페루와 관련된 것은 없다. "새의 둥지에는 지붕이 없다"는 것은 신용목의 관찰에서 얻은 독창적인 성과다. 지붕이 없으므로 새들은 폭우를 그대로 머리로 받아 낼 수밖에 없다. 시인은 새의 깃털이 비에 젖고 마르는 과정을 통해 강인한 날개가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상상한다. 2연에 나오는 "검은 봉지"는 그의 첫 시집에 나온 "비닐봉지", "삼립빵 봉지"의 변형으로 허망한 죽음의 표상으로 다가온다. 바람은 어금니로 검은 봉지를 꽉 물고 놓지 않는다. 여기서 "바람의 어금니"라는 신생의 이미지가 탄생한다.

  폭우는 더욱 거세져 회오리를 일으켜 둥지를 휘감는다. 새들은 고독의 힘으로 시련을 견딜 뿐이다. 그 견딤의 힘을 "고독이 뿔처럼 여물었으니"라고 표현했는데, 신용목만의 경이로운 독창적 표현이다. 새들은 시련을 가해 오는 "검은 과녁"을 향해 최후의 일격을 가하려고 급소를 찾아 순간의 기회를 노린다. 고독이 뿔처럼 여물어 "사지 잘린 뿔처럼" 돌진하면 "검은 과녁"이 파열하여 사물의 운명을 자유롭게 풀어놓는 날이 올 수 있다. 그 순간 새는 죽음을 맞을지 모른다. "하늘에 등을 대고 잠드는 짐승, 고독은 하늘이 무덤이다"라는 구절은 죽음을 불사하는 새들의 극한적 투지를 암시한다. 요컨대 이 시는  새를 비유의 매개로 하여 죽음의 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바람의 어금니"를 지나 과녁의 중심을 뚫으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시행의 연결에 많은 변주와 비약이 개입한 것은 함축성이 강한 독특한 시를 제작하려는 시인의 열망 때문이다. (p. 시 105-107/ 론 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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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숭원 비평집 『매혹의 아이콘』에서/ 2021. 6. 30. <파란> 펴냄

  * 이숭원李崇源/ 1955년 서울 출생, 1986년 평론 부문 등단, 저서『서정시의 힘과 아름다움』『정지용 시의 심층적 탐구』『초록의 시학을 위하여』『폐허 속의 축복』『감성의 파문』『세속의 성전』『백석을 만나다』『시 속으로』『미당과의  만남』『김종삼의 시를 찾아서』『목월과의 만남』『몰입의 잔상』『구도 시인 구상 평전』『탐미의 윤리』, 충남대 · 한림대 · 서울여자대학교 교수 역임// 시와시학상 · 김달진문학상 · 편운문학상 · 김환태평론문학상 · 현대불교문학상 · 유심문학상 · 한국가톨릭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