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집 속의 시

이찬_비평집『사건들의 예지』/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 : 이원

검지 정숙자 2022. 11. 23. 02:14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

 

    이원

 

 

  검은빛에 갇힌

 

  길들, 제 스스로 몸을 구부려 돌아가고 있는 것

  하루, 벽을 밀고 가는 것

  한여름에 모포를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는 형국

 

  물 빠진 뻘에 배가 여럿이다

  바다 멀리까지 보인다

  죽은 사람 산 사람 모두 여기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은 없는 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인지조차 모를 것이다

     -전문 (p. 48-49)

 

  ◈ 우리 시대 시의 예술적 짜임과 미학적 고원들_힘과 긴장(부분)

  이원의 시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은 제목에서부터 우리를 후려갈긴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밑바닥에 웅크린 '불안'과 대면케 한다. 저 '불안'은 실상 우리의 육신에 가해지는 물리적인 통점에서 오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 생이 영원한 수 없을뿐더러 무의미의 아가리로 집어삼켜질 헛되고 헛된 시간의 발악에 지나지 않는다는 '근본 기분'으로부터 휘날려 온다. 이렇듯 '근본 기분' 가운데 일부를 이루는 '불안'은 단순히 개별 존재자들을 사로잡고 있는 어떤 일상적인 감정을 가리키지 않는다.     (···)

  "살가죽이 벗겨진 자화상"이라는 뒤틀린 형상이 현시하는 소름 돋는 진실은, 우리 삶 곳곳에 편재하는, 자기를 기만하고 은폐하고 과장하는 허구의 파노라마이자 자기합리화의 검은 이야기 사슬이다. "안이 들끓어 밖을 보지 못하는 것은"이라는 구절은 우리 마음에서 소용돌이치는 숱한 찢김과 괴로움과 싸움을 축약하는 동시에 그것을 줄이거나 없애 버리기 위해 움터 오르는 완고한 자기 정체성의 성채, 그렇게 붙들어 둘 수밖에 없는 정지된 형상으로서의 "자화상"을 일컫는다. 이 형상을 뒤따르는 "없는 안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라는 문양은 자신의 참혹한 진실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수반되는 온갖 분장술과 무대화의 장치들, 곧 자기 합리와의 무대에서 상연되는 기만과 은폐와 연극적인 몸짓을 뜻한다.

   (···)

 마지막 5연에 나타난 "다시는 사람으로 태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난다 해도 나는 내가 사람인지조차 모를 것이다"는 불가의 윤회를 떠올리게 하면서도, 그것을 비틀어 훨씬 더 깊은 막막함이 침공해 오는 근원적인 허무의 세계로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이 시의 참 주제, 알랭 바디우가 말하는 진실의 윤리학에 가까운 시인의 사유가 어슴푸레한 윤곽을 그리기 시작한다. 5연의 저 이미지가 현시하려는 것은 윤회의 불가능성과 그 헛됨에 대한 풍자와 조롱의 발설이 아니라, 다음 생에까지 이어져 가는 윤회라는 인간중심주의의 끈질긴 허상이자 우리가 회피하고 외면해 온 무수한 진실들이기 때문이다. (p. 49 (···) 50-51 (···) 5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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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찬 비평집 『사건들의 예지』에서/ 2022. 10. 1. <파란> 펴냄

  * 이찬/ 1970년 충북 진천 출생, 2007년《서울신문》신춘문예를 통해 문학평론가로 등단, 저서『현대 한국문학의 지도와 성좌들』『20세기 후반 한국 현대시론의 계보』『김동리 문학의 반근대주의』, 문학평론집『헤르메스의 문장들』『시/몸의 향연』『감응의 빛살』, 문화비평집『신성한 잉여』, 2012년 제7회 김달진문학상 젊은평론가상 수상, 현)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