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그런 밤이 있다 외 1편/ 고우리

검지 정숙자 2022. 12. 3. 02:56

 

    그런 밤이 있다 외 1편

 

    고우리

 

 

  너를 생각하며

  목이 찢어지도록 우는 밤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소리 내지 못해

  삼키고 삼키느라 목이 아프다

 

  맨손으로 닦아낸 눈물이 마르는 속도와

  흐르는 속도를 이기지 못해

  두 손이 눈물범벅이다

  가슴팍까지 젖은 티셔츠 무게만큼이라도

  네게 진 빚을 덜어 주면 좋겠다

 

  내일이면 잊혀질 미안함이라도

  목구멍 상처 또한 아문다고 해도

  오늘 밤은,

  빈주먹으로 가슴 치며

  네 이름 부르고 또 불렀다고

  언젠가 멋쩍게 웃으며

  변명할 수 있는 밤이었다고

  

  나 혼자 기억하고 싶은 그런 밤이 있다                       

          -전문(p. 76)

 

 

        -------------------------------

   순간접착제가 처음이라면

 

 

  주의하세요

  눈이 따갑고 눈물이 날 거예요

   콧구멍 안쪽 깊은 곳이 찌릿할 거예요

  얼굴을 최대한 멀리 하고

  재빨리 사용하고 뚜껑을 닫으세요, 꽉 잠그세요

 

  손에 묻은 건 문지르고 문질러져서 저절로 없어질 거예요

  바닥에 엎지른 건 어쩌지, 하는 틈에 이미 굳어 버려서

  주워 담을 수도 닦아낼 수도 없게 되어요

  가령 당신이 쏟아 버린 내 이름처럼

  무심코 휴지로 닦으려다 휴지마저 바닥에 붙을지도 몰라요

  원래 그런 것이니 그냥 받아들이세요

  사용하기 전에 주의사항을 꼭 읽고, 기억하세요

 

  그래서 사용 연령 제한이 있는 거겠죠

  이 모든 것이 뜨겁고도 강렬한 첫 키스와도 같아서

  오늘 하루가 당신에게 깊이 박힐 거예요

  사랑은 초강력이며, 순간이겠지요

 

  순간이라는 말은 당신이 알고 있는 것보다 뜨겁고 멀답니다.

     -전문(p. 115-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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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순간이라는 말, 뜨겁고 멀다』에서/ 2022. 11. 15. <상상인> 펴냄

   * 고우리/ 2015년『천안문학』으로 등단, 시집『푸른 달의 시선』『민달팽이 주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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