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빈집 외 1편/ 이돈형

검지 정숙자 2022. 12. 4. 01:42

 

    빈집 외 1편

 

    이돈형

 

 

  사람 없이

 

  지내는 일이 어렵다고 울타리 안의 작은 나무들이 간간이 바람에 몸을 뒤척인다 이 뭉개짐이 어지간히 싫은가 보다

 

  반쯤 열린 우체통에 몸을 기대자 한 사람의 이름을 악물고 있던 나무들이 일제히 입을 벌려 그 이름을 뱉어내

 

  추락하던 손을 내밀어 사람을 받는다

 

  빈집을 놔두고 그리움을 파묻을 수도 없고 아직 내 몸엔 빈 곳이 많아 그의 기록은 끝나지 않아

 

  누가 나를 뒤에서 민다면 터무니없는 말이겠지만 엎어질 듯 한 발짝 밀려 들어가 이 먹빛 고요를 깨뜨리고

 

  미처 씻기지 못한 울음을 토해 낼 것이다

 

  불량한 순례자처럼

      -전문(p. 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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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디잘아서

 

 

  잘디잘은 돌멩이처럼 쉽게 구를 수 있다면 부르르 떨며 부서질 수 있다면

 

  아무렇게 뒹굴다 부딪치거나 터져도 웃는 돌멩이처럼 근근이 소멸에 가까워진 돌멩이처럼

 

  닮고 싶다

 

  그런 돌멩이 옆에 팔베개를 하고 누워보면 쓸쓸함도 따뜻하다고 돌멩이에 코를 대면 가슴을 쓸어내린 냄새가 난다고

 

  누군가에 발길질하고 싶을 때 그 냄새를 맡으며 부서질 대로 부서져 잘디잘은 사람이 될 수 있겠다고

 

  잘아서 울음도 쉽게 망가지고 식은땀도 넉넉하게 흐르고 어쩌다 뜨거워져도 금세 식어버리는

 

  아주 잘디잘아서 어떤 영혼에도 쉽게 상하는 

 

  가끔은 제 돌멩이에 뒤통수를 맞고도 배시시 웃는 돌멩이처럼

 

  아껴둔 쓸쓸함을 아는 돌멩이처럼

     -전문(p.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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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제3회 선경문학상 수상작 『잘디잘아서』에서/ 2022. 11. 25. <상상인> 펴냄

   * 이돈형/  2012년『애지』로 등단, 시집『우리는 낄낄거리다가』『되돌아보는 사람은 모두 지나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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