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기다림의 여심女心
김용철/ 소설가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 그중에서도 자신이 보고 싶거나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린다는 것은 한편 아름답고 한편 슬픈 일이다. 언젠가는 그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희망과 기대로 보면 아름다운 노릇이지만, 그렇게 보고 싶은 사람을 여영 만나지 못해서 절망과 고독의 나날이 계속된다면 그처럼 괴롭고 슬픈 일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을 가지지 말라/ 미운 사람을 가지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은 못 만나 괴롭고愛別離苦/ 미운 사람은 만나서 괴롭다怨憎會苦"고 했다. 헤어져 만나지 못하는 고통과 싫은 사람을 만나서 생기는 고통을 말하고 있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사 고통 아닌 것이 없다. 전자는 사랑 때문이며 후자는 미움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를 고통의 바다苦海에서 건져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곧 사랑과 미움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그런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많은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사랑의 이야기나 시는 누구를 미워해서 만날까 두려워하는 이야기보다는 그립고 보고 싶은 데 상대방이 오지 않아서, 혹은 그 사람과 이별해서 그를 그리워하는 안타까움이나 기다리는 마음을 표현한 글이 훨씬 많다.
미당 서정주 선생의 「신부」라는 산문시를 읽어보면, 첫날밤에 신랑이 제 잘못으로 신부를 색녀로 오해한 뒤 신방을 버리고 뛰쳐나갔다가 40년인가 50년인가 지나서 그 신부네 집에 다시 와 그 방문을 열어 보니, 신부는 첫날 밤 모습 그대로 초록저고리와 다홍치마를 입고 앉아 있어 너무 안쓰러운 생각에 그 어깨를 어루만지니 순간, 폭삭 초록색 재와 다홍색 재로 내려앉아버렸다는 표현이 있다.
月樓秋盡玉屛空/ 월루추진옥병공
달 밝은 누각에 가을은 깊고 옥병풍 허전한데
霜打蘆洲下暮鴻/ 상타노주하모홍
서리 내린 갈대섬에 저녁 기러기 내려앉네.
搖琴一彈人不見/ 요금일탄인부견
거문고를 아무리 타도 그리운 임은 오지 않고
藕化零落野塘中/ 우화영락야당중
연꽃만 들판의 못 가운데서 시들어 떨어지네.
선조 때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규원閨怨」이란 시이다. 15세에 명문가의 아들인 김성립과 결혼한 시인은 남편이 주색에 빠져 기방을 전전하느라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대부분이라, 그 남편을 기다리며 다락에 병풍을 둘러놓고 거문고를 타면서 이런 애절한 시를 쓴 것이다.
우리 문학사상 기다림의 극치를 이룬 전설이 있다면 신라인 박제상과 그의 아내에 얽힌 망부석의 이야기를 뻐놓을 수 없다. 그 사연은 신라 가요인 「치술령곡」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나, 그 내용은 아직 전해지지 않고 있다. 그밖에 정읍에 사는 한 행상의 아내가, 남편의 안위를 걱정하여 부른 「정읍사」도 있고, 장사長沙 사람이 전장에 나가 돌아오지 않음으로, 그 아내가 선운산에 올라 불렀다는 「선운산가」도 있다. 그리고 함축성 있게 애끓는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고려가요 「가시리」도 기다림의 전통적 여심을 노래한 연가라 할 것이다.
이렇게 몇 작품만 보아도 기다림의 문학은 그 대부분이 여성 편에서 남정네를 기다리는 애상과 원망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적인 유교사회의 규범으로는 남자는 밖에 나가서 공부를 하거나 돈벌이를 하거나 심지어 분탕질을 일삼고 돌아오지 않아도, 여자는 언제까지나 애이불비愛而不悲하면서 기다리며 사는 것이 당연한 미덕이요 운명으로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으레 남정네를 기다리며 사는 것이 체질화된 채, 독수공방, 애이무원愛而無怨하는 인내를 숙명으로 알면서 살아온 것이 사실이다.
허나 이제는 기다림의 굴레를 여성에게만 강요하거나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런데도 우리 할머니의 할머니가 사시던 그 옛날의 기다림의 여심이 자꾸 그리워지는 것을 왜일까. ▩ (p.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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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2-9월(251)호 <수필> 에서
* 김용철/ ★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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