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 없는 나라
문효치/ 시인
내 젊은 시절은 죽음과 바로 옆에서 지냈다. 죽음의 그림자가 내 주변에 어른거렸고 나는 그것이 보내오는 두려운 표정에 가위눌리곤 했다. 그것은 집요하여 내 일상의 대부분을 점령했으며 여간해서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밥을 먹고 시간을 소비하는 일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에 대한 궁리로 채워졌다. 이 공포의 굴레를 벗어나 평화를 찾는 일이 나에겐 중요한 과제였다. 그러나 좀처럼 이 과제를 풀 수 없었다.
그즈음 나는 우연히 무령왕의 목관재木棺材 앞에 서 있었다. 늘 기진맥진, 탈진 상태의 육신은 의욕도 꿈도 없었지만, 무엇인가 나를 덕수궁 현대미술관으로 이끌었다. 나는 처녀분處女墳으로 발견된 왕릉의 유물들을 대충 둘러본 후에 옻칠이 남아 있는 목관재를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무령왕이 누군가. 왕족으로 태어난 그는 소년 시절부터 많은 죽음과 조우하면서 자랐다. 13세 때 21대 개루왕이 아차산에서 장수왕의 포로가 되어 백제의 반역자 재증걸루에게 모욕적인 죽음을 당했다. 16세 때는 22대 문주왕이 신하 해구에게 시해당했다. 18세 때는 23대 삼근왕이 암살당했다. 40세 때는 24대 동성왕이 신하 백가에게 시해되고 그해에 25대 임금이 되었다.
이렇듯 왕실의 비참한 죽음들을 경험한 왕, 그 왕을 저승으로 데려다주고 이제 서울에 와 있는 목관을 보며 나는 내 과제 해결의 실마리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죽음과 친하게 지내자는 것이었다.
죽음은 삶의 이웃이라는 것, 따라서 저승도 이승의 이웃 동네라는 것, 아니 죽음은 삶의 한 측면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내가 무슨 대단한 철학자인 것처럼 폼을 잡았지만, 그건 그렇지 않다. 사실은 죽음의 공포를 조금이라도 잊기 위한 나 자신의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좀처럼 눈에 띄지 않는 고통에 내 생명이 삭아가고 있는 와중에 그래도 내 상상력과 감성이 살아나 시와 대면할 수 있게 된 것은 천만다행이었다. 내 허파나 심장 그리고 뇌 속에 쌓여가는 마귀와 같은 죽음의 그림자에서 시라고 하는 물질(?)이 분비되고 있었으니 나는 가위눌림을 뽀도시 들추고 무언가 아련한 빛 같은 것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용히 생각을 모으면 천년의 시간도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조용히 마음을 움직이면 만 리의 공간도 꿰뚫어 볼 수 있다던 유협의 말이 떠올랐다. 그래, 천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자고 멈먹었다. 그래서 무령왕을 한번 만나보자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지금 내 앞에 와 있는 '무령왕의 목관재'가 타임머신이었다. 성큼 올라타니 물살을 가르며 항해하는 목선처럼 어딘가로 저어 가고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풍경을 구경할 새도 없이 도달한 곳, 거기는 백제였다. 개루왕이 장수왕에게 붙잡혀 죽자 다음 왕이 수도를 옮긴 바로 그곳, 웅진이었다. 백제인의 말소리가 두런두런 들리고 왕의 신하들도 오가고 있는 천오백 년 전의 거리가 신비스럽게 느껴졌다. 꿈인 듯 생시인 듯 거리를 소요하다가 저만치에서 반짝이는 불빛을 보았다.
천년의 세월 속에 오히려 꺼질까
삼베 심지에 배어드는 들기름은
임의 머리맡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백골을 비추고
자유로이 나래 펴는 영혼을 밝히고
하여, 그의 오십대쯤의
손주의 방싯거리는 웃음의
새빨간 꽃잎에서도 다사롭게 타다.
사방으로 둥근 도자陶瓷의 가장자리에
유계幽界의 묵향으로 번지는 그을음은
지금, 내 붓끝에 묻어 새롭다.
-문효치, 「무령왕의 도자 등잔」 전문
꺼지지 않고 지금도 타고 있는 불빛은 생명이었다. 백제와 '한국'의 경계는 무너지고 없었다. 그때가 지금이고 지금이 그때다. 다시 말해 죽음이 삶이고 삶이 죽음이다.
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많이 덜어낼 수있었다. 그것은 웅진에 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공주시에 천여 년 전 웅진이 있었다. 나는 내 전용 타임머신을 타고 수시로 드나들며 많은 시를 쓸 수 있었다. ▩ (p.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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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학의 집 · 서울』 2022-9월(251)호 <글감이 있는 그곳 88> 에서
* 문효치/ 1966년 ⟪한국일보⟫ &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 『계백의 칼』『별박이자나방』『나도바람꽃』『어이할까』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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