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탈’과 ‘무덤’의 존재론
정숙자 시집 『열매보다 강한 잎』
신진숙
정숙자 시인은 지금 ‘비탈’을 보고 있다. 인간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살아갈 ‘지구’라는 비탈을 본다. 그리고 비탈의 어둠을 만진다. 비탈은 그러나 생과 사를 가르고, 빛과 어둠을 구분하는 일직선으로서의 비탈이 아니다. 그녀에게 비탈은 둥글게 말려진 순환적 통로들이다. 즉 비탈은 ‘무덤’이다. 둥근 봉분이 상징하듯, 무덤은 만물이 흙으로 돌아가고 그 흙을 통해 또 다른 생명이 이어져 가는 한없이 길고 긴, 보이지 않는 생사의 흐름을 내포한다. 비탈이 현존재의 실존적 기초라면, 무덤은 현존재 너머의 무한한 존재의 흐름과 그 가능성이 될 것이다. 즉, 비탈은 존재의 은폐를, 무덤은 그 개시를 향한다. 정숙자 시인에게 시란 이 보이는 세계에 흐르고 있는 보이지 않는 세계의 언어들을 번역하고 해석하는 일이 아닐지. 따라서 그녀의 시는 고유한 실존에 대한 염려, 존재자와 존재의 차이에 대한 불안으로부터 출발한다.
꼬부리고 앉아 생각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자. 그는 묻고 있다. 말은
너무 늦다. 그는 본능으로 묻고 있다. 그의 머리와 가슴속에는 무수한
갈고리가 혹은 엄청나게 큰 하나의 갈고리가 걸려 있다. 로댕만이 아니
다. 고뇌에 처해 보라. 인간은 태아 적부터 물음표로 포즈를 잡는다. 삶
의 준비다. 시작이다. 진행이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추워도 꼬부린다.
묻고 있는 거다. 물어야 할 때 묻고 싶은 거다. 말은 너무 늦다. 몸이 먼
저 말한다. 물을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몸을 푼다. 쫙 펴고 눕는다. 죽
음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로댕은 묻는다」전문
존재에 대한 염려와 불안은 현존재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가) 묻게 만든다. 삶의 존재 형식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묻는 행위 그 자체에서 찾아야 한다. 묻는 것, 그것만이 현존재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진리에 가깝게 할 것이다. 만일 현존재가 더 이상 묻지 않는다면 그는 이미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혹은 다른 모든 세계 내 존재들처럼 단지 있음일 뿐인 상태로 살아갈 것이다. 인간이 다른 있음의 존재들과 구분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물음의 형식을 통해서이다. 따라서 “인간은 태아 적부터 물음표로 포즈를 잡는다.” 물음의 포즈, 그것은 삶의 유일한 ‘준비’이자 진정한 ‘시작’이다. 그러므로 세계 내 존재자는 모두 “그게 삶이라고 믿으며 나무는 나무대로 풀은 풀대로 주어진 만큼 서 있다 산다.”(「평균풍속」)
하이데거가 언젠가 말했듯, “현존재는 누구인가에 관한 물음”이며, “나 자신, 주체, 자아로부터 이 ‘누구’를 ”대답“하고자 노력함으로써(질문함으로써) 현존재의 세계 내 존재적 해명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인간의 삶이란 어떤 궁극의 답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묻는 행위와 그것으로부터 발생하는 ‘고뇌’를 통해 그 의미를 획득한다. 이러한 물음의 형식을 통해 현존재는 아노미적 회의의 연속, 그 블래홀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다. 즉, 정숙자 시인에게 물음은 물음의 물음이라는 확고함으로 전개된다. 즉, 이 물음의 물음은, 단지 물음일 뿐인 삶에서 의미를 번역하고, 찾아내는 ‘글쓰기’/시쓰기를 가능하게 하는 역설적 바탕이다.
오늘도 나는 보았다. 내가 있으므로 어둠이 있고, 내가 있으므로 사
물이 있다. 일체의 어둠과 혼돈이 나로부터 비롯한다. 어찌 밝지 않음
을 탓할 것인가. 어둠에 갇혀 사유하고, 어둠을 걸러 정화되며, 어둠을
딛고 나아가는 도리가 글 쓰는 이의 항거다. 어둠은 여명의 또 다른 시
간, 시시각각 출렁이는 희비 또한 시간의 변화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들림을 빚어 꽃무늬 놓고 상처를 다스려 깃털을 마련해야 한다. 예기
치않은 어둠은 예견 못한 영감의 실마리가 아닐까. 오늘도 나는 몇 기
(基 )의 어둠을 3.5플로피에 저장하였다.
-「헐렁한 메모」전문
시인은 말한다. “나는 어둠을 보았다”라고. 어둠을 보는 행위 자체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존재의 물음은 끝이 없으므로, 그것의 답을 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이 물음을 던지는 존재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다. “내가 있으므로 어둠이 있고, 내가 있으므로 사물이 있다”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출현한다. 이때의 의심하는, 존재하는 ‘나’는 하이데거적 의미에서 ‘자기의식’이다. “자기의식의 주체서이 절대적으로 확실한 표상의 토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존재자 전체는 표상된 객체의 주관적 세계로 변형되고, 진리는 주관적 확실성으로 변화”할 수 있게 된다. 이 경우 시인은 현상 속에 은폐된 진히를 개사하는 자이다. 즉, 시인은 ‘어둠’이 “여명의 또 다른 시간”임을, “시시각각 출몰하는 희비” 또한 무한한 (존재) “시간의 변화태”에 불과하다는 것을 나는 자이다. 캄캄한 실존의 어둠이 “영감의 실마리”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다시 말해 “세상은 오늘도 휘청거린다/ 멈추지 않는 어둠과 폭풍이 싸라기별 하나도 벙글지 못하게 한다.” 그러나 “시력은 이때부터다.”(「오선의 깊이」)
1/X로 축척된 지구의地球儀 위를 걷는다. 온몸이 흔들린다. 어느 한
군데 비탈이 아닌 곳 없다. …(중략)… 비탈에 놓인 우리는, 나비가 아닌
우리는 비척거릴 수밖에 없지 않은가. 모든 벌레가 다 나비가 되는 것도
아니잖은가. 나비는 날아다니는 별이다. 먼 데 별이야 정체를 알지 못한
다. 제 몸속 비탈을 지워버린 나비 날개가 방향을 알려주는 진짜 빛이지.
조용한 밤이면 이따금 미끄러지는 소리가 난다. 꿈꾸는 이들이 비탈을
헛디딘 순간이리라. 빗방울보다 슬픈 땅, 내일도 모레도 딴 길은 없다.
-「그러므로 강물도」부분
비탈에서의 삶은 불행한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비탈을 지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삶이 아니다. 비탈을 평지로 착각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비탈일 뿐인 삶의 지평을 지울 수는 없다. 꿈은 바로 이러한 비탈이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시인이 “이따금 미끄러지는 소리가 난다”고 말할 때의 미끄러짐은 바로 이러한 비탈을 인식하는 순간에 발생한다. 삶은 헛디딤으로만, 비척거림의 몸짓으로만 그 의미를 드러낸다. 비탈을 지운다는 것은 “먼 데 별”을 향하는 비탈에 대한 초월이 아니라, 비탈을 통한 삶의 변증이다. 즉, “제 몸속 비탈을 지워버린 나비 날개”처럼 그것은 진리의 빛을 향한 수없는 아픈 날갯짓, 그 존재의 고통을 통해 획득되는 어떤 것이다. “내일도 모레도 딴 길은 없다.” 단지 이 비탈을 살아가는 슬픈 실존이 우리를 의미 있는 삶으로 이끌어갈 것이다. “지구인이면 누구나 자신의 그늘만으로도 만선滿船” (「인생은 꿈이 아니다」)일지라도, 그 그늘이 있기에 존재의 의미를 밝힐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이란 매달림”이며 “살아남았음이란 매달렸음”(「열매는 매달림의 언어다」)을 의미한다.
그러나 비탈은 “온 만큼만 돌아가면 태초”(「한바퀴」)가 되는 비탈이다. 즉, 비탈의 마지막엔 종말이 오고 거기 무덤이 존재하지만, 이 무덤은 또 한없는 생명의 흐름 속에 재차 거듭 흘러가 다시 태어나는 ‘生 ’이다.
무덤이야 고요와 고요가 몸 비비는 곳
무덤이야 고요와 고요가 말 나누는 곳
강물들 바다로 달리는 오밤중이면
내 삶의 소란은 한데 모여 고요를 향해 걷는다
제깟 무덤이 무슨 변화가 있겠느냐고?
그러나 무덤도 까맣게 타고
살아나고 바람을 견딘다, 너호 너호
아주 죽을 죽음을 기다린다
동그라미 어느 날 밭두둑 되고
난장이 되고, 다시 또 청산이 되면, 그 때 바로
고요는 고요조차 모르는 고요이려니…
-「나의 니르바나」부분
“안에도 밖에도 바람뿐”(「바닥에서 날개가 꿈틀거리다」)인 시인에게 죽음은 종결을 의미할 수 없다. 바람이 처음도 끝도 가지지 못함으로써 바람인 것처럼, 죽음은 끝이 아닌 다른 시간의 흐름이다. “동그라미 어느 날 밭두둑 되고/ 난장이 되고, 다시 또 청산이” 되는 시간. 그것은 진정 고요라는 개념조차 지워버린 고요의 무한에 이르는 시간의 흐름이다. 그리고 이 무덤의 시간은 “내 삶의 소란이 한데 모여 고요를 향해 걷는” 시간과 정확히 일치한다. 현존재자 시간과 무한한 존재의 시간이 겹쳐지면서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진리가 개시開示된다. 즉, 시인은 변화만을 지속하는 우리의 삶 속에서 “개천, 아니 강이 되어도 물방울운 서로 헹굴 뿐/다른 꿍꿍이 품지 않는”(「변연대비」) 무변한 자연-흐름을 읽어내는 것이다. 시는 언제나 이미 존재하는 이 흐름의 수평, “걸릴 것도 비울 것도 까르르 솟구칠 것도 없는 0시”(「날짜변경선」)를 향한다. 그녀의 시 「열매보다 강한 잎」은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아름답다.
잎들은 알을 품는다
알보다 먼저 달리고 알보다 늦게 익는다
첫 잎이자 마지만 두 잎
간절히 합장한 두 잎
두 잎을 밀봉한 다음이라야 잎 잎 붉은 잎 몸을 날린다
가슴 한복판으로 툼벙툼벙 떨어진 날들
밀리고 밀린 나이테 파문! 나무 속에 호수가 있다
잎새에선 노상 잔물결 소리가 난다
두 잎이면 모든 잎이다
두 잎이 남아 있는 한 어떤 내일도 초록빛이다
-「열매보다 강한 잎」부분
‘초록’은 모든 것을 탕진하지 않는 탕진이다. 그것은 “몸을 날”려 “툼벙툼벙 떨어”진다. 그리고 밖으로 밀려난다. 그러나 떨어지고, 밀려나는 것은 소멸이 아니라 ‘파문’이다. 지워지지 않는 존재의 파문. 이 순간 ‘나무’도 하나의 물결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생의 파문은 이어짐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문명의 속도보다 조금 늦게, 조금 더디게 발견될 뿐이다. 중요한 것은 이 아름다운 존재의 파문이, 사라지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마지막 두 잎’에서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잎새에선 노상 잔물결 소리가 난다.” 삶에 대한 맑은 시선이다.
정숙자 시인의 이러한 깨달음은 타인/타자에 대한 시선 속에서도 발견된다. 어떤 의미에서 시란 내가 너에게 직접 손으로 써서 보내는 마음의 형식, 즉 ‘손편지’다. 내가 나로부터 탈출하여 하나의 진정한 실존적 의미에 다가가는 것은 내가 너에게로 흘러드는 바로 그때부터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흐름이 차단된다면, 생은, 그리고 시는 흐를 수 없다. 그래서 시인은 묻는다. “당신은 타인에게 어떤 길인가?”(「길에 대한 리서치」)라고. 타인을 향한 마음의 순정이 편지/시의 온기이다. 그것은 편지가 자기애로부터 출발하기보다 타인에 대한 구체적인 동요로부터 출발하기 때문이다. 즉, 편지란 독자에 대한 무한한 욕망에서 시작하는 글쓰기가 아니라 단 한 사람을 향한 글쓰기이다. 편지는 “허공으로 띄워 보내는 꿈이 아니라/포근히 가 닿을 주소와 그 주소의/주인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은 말한다. “나는 내 소유의 모든 잉크 중에서/가장 슬픈 채도를 아껴/그대의 이름을 적는 데 쓴다”(「네 번째 하늘에서」)라고. 바로 이것이 그녀가 “퓨즈가 나간 전구”(「전등과 고양이」)를 들고 수리를 꿈꾸며 거리를 배회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숙자 시인의 시들은 결핍을 모른다. 그리고 결핍을 모르므로 과잉을 모른다. 그녀의 언어들은 간결하며 정갈하다. 깊은 사유를 담지만 넘치지 않고, 꿈을 꾸지만 부족함을 모른다. 그러므로 그녀의 언어는 의식과 무의식의 평형, 혹은 의미의 수평을 향한다. 그러한 균형감이 너무나 잘 조율되어 있어 그녀의 시는 흔들리지만 흔들림이 없다. 우리는 그것을 때로 연륜이라고도 깊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생각하길 시란 파열적 과잉과 잉여를 향할 때 우리가 처한 이 자본주의 현실의 어떤 닫힌 맥락들을 넘어 질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언어는 수평적이기보다 언제나 더 비탈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물음이 살아 있는 듯 멈추지 않는다. 내 몸 어딘가 시처럼 깊은 곳이 출렁인다.
* 신진숙/ 문학평론가. 2005년『유심』평론 당선. 주요 논문으로「송욱문학의 시적 주체의 변모 양상 연구」. 현재 경희대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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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현대시』2006.11월호 <현대시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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