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시집 · 열매보다 강한 잎

서평/ 단정한 시적 자의식과 문체 - 홍용희

검지 정숙자 2010. 10. 24. 12:12

    

     단정한 시적 자의식과 문체

   정숙자,『열매보다 강한 잎』(시작, 2006년)

 

     홍용희

                                                                                                                      

 

  “문체는 그 사람 자신이다.” 라는 명제는 문체론의 특성을 가장 집약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문체란 단순히 낱말들의 배치와 그 구성적 조화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인의 사고방식, 세계관, 미적 주관성, 감각, 자의식 등의 내밀한 응축적 산물이다. 그리이스의 수사학자였던 롱기누스가 ‘귀를 통해 영혼까지 사로잡는’ 문체를 거론할 때, 문체란 세계로부터 숭고미를 발견하는 미학적 방법론과 연관된다.

 실제로 문체는 때로 세상을 재발견하고 변화시키는 비장한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의 서문은 그 대표적인 경우일 것이다. “하나의 유령이 지금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교황과 차르, 메테르니히와 기조, 프랑스 급진파와 독일의 첩보경찰 등 구유럽의 모든 열강은 이 유령을 몰아내기 위해 신성동맹을 맺었다.” 이러한 문체가 성립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공산주의가 세계 변혁의 기운으로 분명하게 등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문체는 이처럼 역사 안팎의 마주침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문체미학을 성취하는 가장 용이한 작법은 과연 무엇일까? 움베르트 에코는 마르크스의 설의법을 활용하는 웅변적 문체에 대해 키케로의 『연설집』이나 셰익스피어작품에서 카이사르의 주검 앞에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행하는 연설과의 영향관계를 짐작해 본적이 있다. 물론 이처럼 문체 역시 여타의 경우처럼 고전과의 상호 대화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문체에 관해 이러한 일반론적 수준 이상의 특정한 작법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완당 김정희의 다음과 같은 전언이 시사적이다. “난초를 그리는 데 있어 법이 있어도 안 되고 법이 없어도 안 된다(寫蘭有法不可無法亦不可).” 문체의 작법 역시 이처럼 본래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있는 것도 아닌 탓에 정해진 전범이 따로 있을 수 없다. 다만, 지속적으로 새롭게 창조될 수 있을 뿐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창작은 한 개인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스스로 자신의 문체를 넘어서면서 자신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해나가는 것이다. 

  정숙자의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을 읽으면, 시집의 중심부를 가로지르는 문체론적 자의식을 감지할 수 있다. 퍽 견고하고 가지런하면서 동시에 온화한 미감을 추구하는 시인의 자기 의지가 그의 문체를 규정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이것은 정숙자의 시 세계의 단정한 정체성을 견지하는 방어막이면서 동시에 외부 세계를 향한 좀 더 깊은 통찰을 가로막는 요소로 작용한다.

  그가 나름대로 일관되게 지향하는 시의 내용가치와 형식론은 다음과 같은 시편들을 통해 쉽게 읽어낼 수 있다. 

     

  나에게는 요즘 새로운 손짭손 하나가 생겼다

  신문이나 전단 등에서 하루살이로는 아까운 그림을 솎아 엽서로 만드는 일이다

  반듯하게 마름질한 아트지에 풍경들을 앉혀놓으면 웬만한 시보다 따뜻하다

  -「간장병과 식초병 - 無爲集 1」부분

 

  남은 기름 잦아들 동안

  어디론가 또박또박 편지를 쓰면

  시인의 빚 조금은 더는 게 될까

  -「여름이 떠나는 아침」부분

 

  봉인되어 익어가는 말

  어떤 울음은 종유석으로, 어떤 참회는 대리석으로, 어떤 그리움은 홍보석으로 살을 굳힌다

  고도로 압축/정화된 언어만이 다이아몬드에 이른다

  -「문인석」부분

 

  꽃밭은 가꿔준 이를 다시 가꾸고, 가꿔준 이가 시인이라면 책상 위에서도 붓꽃이 피게 한다. 가꿈! 이렇게 이쁜 말을 나는 꽃밭에서 덤으로 주웠다. 내가 너를 가꾸면 너 또한 꽃밭 밖에는 다른 나쁜 게 될 수가 없다

  -「문인화」부분

 

  한 편의 시가 “그림을 솎아 엽서”를 만드는 취미생활 중에 “반듯하게 마름질한 아트지에” 만들어지는 풍경이나 “또박또박” 쓴 “편지”와 동일한 반열에서 비견되고 있다. 시란 말쑥하고 단정하고 따뜻한 대상이라는 전제가 바탕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시적 언어는 “종유석/대리석/홍보석”처럼 정화되어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언어여야 한다.

  설령 그가 “편지는 늘 시보다 따뜻하다”(「네 번째 하늘에서」)고 말할지라도 시가 편지보다 따뜻하지 못하다는 의미를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편지는 시처럼 따뜻하다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것은 “꽃밭”을 “가꿔준 이”가 “시인”이라면, 꽃밭이 “책상 위에서도 붓꽃”이 피게 해준다는 표현을 통해 거듭 증명된다. 시인은 일반적인 보통 사람과 달리 꽃밭과 교감하고 소통하는 표나게 순수하고 순정한 인물이라는 인식이다. 하필 “붓꽃”이 등장하는 까닭도 이러한 문면에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붓꽃”이 추억처럼 친숙하고 애잔한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관습적인 상관물이기 때문이다.  

  다음 시편은 시에 대한 자의식과  “시인”의 자존에 대한 언급이 좀 더 직접적이고 본격적으로 개진되고 있다. 

 

  막대기가 셋이면 <시>字를 쓴다

  내 뼈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字 쓸 수 있을까

  땀과 살 흙으로 돌아간 다음 물굽이로 햇빛으로 돌아간 다음 남은 뼈 오롯이 추려

 시

   이렇게 놓아다오

  동그란 해골 하나는 맨 끝에 마침표 놓고 다시 흙으로 덮어다오

  봉분(封墳)일랑 돋우지 말고 평평하게 밟아다오

  내 피를 먹은 풀뿌리들이 짙푸른 빛으로 일어서도록 벌레들 날개가 실해지도록…

  가지런히 썩은 <시>字를 이슬이 먹고 새들이 먹고 구름이 먹고 바람이 먹고…

  -「무료한 날의 몽상 -無爲集 2」부분

 

  화자는 죽어서도 자신의 뼈가 “<시>字”로 가지런히 놓이기를 바란다. 이것은 그야말로 시와 영생하고 싶은 시에 대한 강렬한 애정이 배어나온다. “막대기가 셋이면 <시>字를 쓴다.” “내 뼈 마디 모두 추리면 몇 개의 <시> 字 쓸 수 있을까?” 자신의 온몸이 시의 질료가 되어도 좋겠다는 염원이다. 화자의 시에 대한 열정이 가히 독자들을 숙연하게 한다. 이것은 분명 시인으로서의 소명의식과 자존감을 보여주는 모범이라고 할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시적 삶의 열정과 자의식은 많은 경우에 사물에 대한 특유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의 특장으로 나타난다.

 

  잘 잡힌 균형만이 힘을 기른다 바다가 스스로를 지켜낸 것도 제 안에 답이 있었던 거다

  끝없이 밀려나오는 저 대팻밥

  내면을 깎는 물보라

  간절해야만, 단단해야만, 삼각파(三角波) 아울러야만 비로소 섬일 수 있다

  섬을 꿈꾸는 자만이 섬에 닿는다

  별똥별 사철 두고 돌아오는 곳

  먹구름도 말끔히 헹궈 은빛괭이갈매기 떼로 나는 곳

  외곽으로, 여백으로, 고독으로 나앉은 미래는 오늘도 오로지 용맹정진

  돌 하나만 저리 굴러도 우주의 중심이 바뀌는 것을…

  하물며 핏방울이 젊은 숨이랴

  -「섬의 정신」부분

 

  “섬”의 형세와 내력에 대한 묘사이다. “섬”이 만들어지기까지는 “간절”하고, “단단”해야 하며 아울러 “삼각파”가 어우러지는 부단한 역사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섬”은 늘 “용맹정진”하고 있다. “섬”이 하나의 살아 있는 우주에 비견된다. “돌 하나만 저리 굴러도 우주의 중심이 바뀌는 것을”이라고 할 때, “우주”는 곧 “섬”을 뜻한다. “섬의 정신”은 이처럼 강건할지라도 그 풍경은 너무도 유려하고 아름답다. “별똥별”이 “사철” 노닐고, “은빛괭이갈매기”가 떼로 머무는 장관이 펼쳐진다. 

  “섬”에 대한 이러한 시적 묘사가 외관적인 관찰의 차원을 넘어서 미적 통찰의 영역으로 진전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연의 “하물며 핏방울이 젊은 숨이랴”에 있다. 젊은 “핏방울”에 의해 우주는 부단히 새롭게 창조된다는 의미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시적 통찰의 호흡이 지나치게 짧게 개진되고 있지만, 그러나 부단한 시적 관찰과 묘사의 결과물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적 관찰의 특장은 다음 시편에서도 선명하게 읽을 수 있다.

 

  마지막엔 이것뿐이다  

  꽃 아니다 기둥 아니다 수많은 잎새도 아닌 다만 두 잎뿐이다

  두 잎이면 다시 하늘을 열고 별을 기르고 마파람 부를 수 있다

  껍질 속 두 잎은 우뇌/좌뇌란다

  좌청룡 우백호란다

  씨앗들은 스스로가 명당이요 명문이란다

  흔들림 없는 두 잎을 열고 나무는 걸어 나간다

  큰길 소롯길 모두 제안에 있다

  만 리를 내다보는 키가 되어도 어느 한 잎 잎차례 변치 않는다

  잎들은 알을 품는다

  알보다 먼저 달리고 알보다 늦게 익는다

  첫 잎이자 마지막 두 잎

  간절히 합장한 두 잎

  두 잎을 밀봉한 다음이라야 잎잎 붉은 잎 몸을 날린다

  가슴 한복판으로 툼벙툼벙 떨어진 날들

  밀리고 밀린 나이테 파문! 나무 속에 호수가 있다

  잎새에선 노상 잔물결 소리가 난다

  두 잎이면 모두 잎이다

  두 잎이 남아 있는 한 어떤 내일도 초록빛이다

  -「열매보다 강한 잎」전문

                                    

  시인은 “열매 보다 강한 잎”을 “마지막엔 이것 뿐”이라고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의 잎은 나무 잎이 아니라 “열매”속에 있는 열매의 원형이다. 열매(씨앗)속의 두 잎이면 “다시 하늘을 열고, 별을 기르고 마파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껍질 속 두 잎은 우뇌/좌뇌”이며 “명당이요 명문”의 중심에 해당한다. “껍질 속 두 잎”은 곧 나무의 총체이다. 그래서 “껍질 속 두 잎”에는 “나이테 파문! 나무 속”의 “호수”, “노상” 흐르는 “잔물결 소리”가 내밀하게 살고 있다. “흔들림 없는 두 잎”으로부터 “나무”가 열리고, “나무”는 다시 “흔들림 없는 두 잎으로” 수렴된다. 여기에 이르면, 시적 화자의 상상력은 어느덧 씨앗의 프렉탈적 원리와 그 DNA를 해독하고 있다. 그리하여 “두 잎이면 모든 잎이”고, “두 잎이 남아 있는 한 내일도 초록빛이”라는 결론을 얻게 된다. 그래서 시적 화자는 일상생활이 아무리 비관적이고 어둡다 할지라도, 항상 초록빛의 희망을 잃지 않을 수가 있다. 또한 나무속에서 씨앗을, 씨앗 속에서 나무를 읽어내는, 유기체적인 순환론에 대한 직시가 가능해진다. 

  이와 같이 내밀한 관찰적 시선이 도달한 사물에 대한 심미적 직시는 다음 시편들에서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어둠은 더 이상 그늘이 아니었다

  벙글고 벙근 아지랑이와 보름달로 맞물린 반달 두 개가 들녘 어딘가로, 세상 밖 어딘가로 떠내려갔다

  -「더블플라토닉 수어사이드」부분               

   

  그러나 보아라

  눈… 비… 이슬…

  어느 시간을 돌아온 물도 마지막 길에는 눈이 부시다

  한 생애를 충실히 마친 한 방울 한 방울 물방울들이 깃털을 가다듬는다

   (중 략)

  먼저 돌아간 물방울들이, 또 태어날 물방울들이 하늘 가득 햇볕을 쬔다

  -「물은 한 방울로 태어난다」부분

 

  “어둠은 더 이상 그늘”이 아니라는 것은 어둠이 “보름달”처럼 밝은 빛을 실어 나르는 잠재적 주체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빛과 그늘, 밝음과 어둠이 서로 상반되는 대상이 아니라 유기적인 연속성을 지닌다는 인식이다. 이러한 전일적인 인식론은 “ 눈… 비… 이슬…”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이들 역시 서로 다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사실은 “하나의 물방울”의 변주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점은 또한 “먼저 돌아간 물방울”과 “태어날 물방울”의 경우에도 동일하다. 돌아가는 것과 태어나는 것은 서로 다른 국면의 차이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 근원 동일성을 지닌다는 인식이 전제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적 상상은 이미 패턴화된 인식론의 수준을 크게 넘어서지 못한다. 정숙자 시인이 설정하고 있는 시적 자의식은 대체로 지나치게 관습적 상상력의 범주를 돌파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렇다면 시적 화자가 인식하는 시와 시인의 삶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다음 시편은 이에 대한 응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어둠에 갇혀 사유하고, 어둠을 걸러 정화되며, 어둠을 딛고 나아가는 자세가 글쓰는 이의항거다. 어둠은 여명의 또 다른 시간, 시시각각 출렁이는 희비 또한 시간의 변화태에 불과하다. 우리는 흔들림을 빚어 꽃무늬 놓고 상처를 다스려 깃털을 마련해야 한다. 예기치 않은 어둠은 예견 못한 영감의 실마리가 아닐까 

  -「헐렁한 메모」부분

 

  “글 쓰는 이”란 “어둠에 갇혀”서도 이를 “사유하”고 정화시키며 헤쳐 나가야 한다고 스스로를 향해 다짐하듯 전언하고 있다. 그리하여 “시시각각 출렁이는 희비”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이를 “꽃무늬”처럼 단아하고 경쾌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글을 씀으로서 삶의 고통과 번민을 차원 높게 승화시켜 나가고자 하는 자기의지를 엿볼 수 있다. 시적화자는 시 쓰기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지켜나가고자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대목에서 왜 하필 “꽃무늬”인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어둠과 상처를 “꽃무늬” 와 “깃털”로 만든다는 것은 진정한 정화와 치유가 아니라 형식론적인 타협이며 봉인이 아닌가? 어둠과 상처를 어둠과 상처로 노래함으로써 그 내면으로부터 빛과 치유의 내성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어둠과 상처를 신명과 율동의 자양으로 전환시킬 수는 없을까? 어둠에 대한 관찰은 어둠의 진정한 힘을 구현하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지 않을까?  “꽃무늬”와 “깃털”을 마련해야 한다는 언명은 시인이란 탈속적인 고상한 존재라는 감상적인 선입관의 산물이 아닐까?

  그러나 정숙자는 이러한 질문과는 무관하게 일관되게  단정한 정서적 취향을 시적 자의식으로 견지해 나간다. 그래서 과연 그의 시적 정조는 퍽 결이 곱고 단아한 모습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시적 어휘 역시 사소한 일상 속에서도 곱고 따뜻하고 말쑥한 대상을 선별하는 면모를 드러낸다. “가꿈! 이렇게 이쁜 말을 나는 꽃밭에서 덤으로 주웠다”(「문인화」), “손짭손 하나가 생겼다”(「간장병과 식초병 - 無爲集 1」) 등에서 보듯 언어선택에 있어서까지 감상적인 시인의 미적 자의식에 머무는 경향이 노정된다. 

 

  강물 바라볼 때 아늑했음도

  건네받은 물 한 그릇 두고두고 고마웠음도

  <물별> 그 이름이 그 토록이나 간절했음도

  해돋이엔 저절로 눈이 뜨이고 이슬내린 풀 언덕 정다웠음도

  물로써 마지막 발을 헹구고… 하늘로 햇살로… 다시 물방울로 되돌아감도

  -「물별」부분

 

  시적 화자는 “<물별>”이란 단어에 깊은 애착을 가진다. 물론, 자신의 회억의 시간이 “물별”이란 언어를 통해 함축될 수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과거를 경험된 현재로 재현시키는 역동적인 힘을 지니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와 같은 감상주의적 언어의 집착은 앞에서 지적한 “흔들림을 빚어 꽃무늬 놓고”(「헐렁한 메모」)에서의 “꽃무늬”처럼 상황을 지나치게 평면화시키는 요소로 작용하게 된다. 단정한 시적 자의식과 문체론이 심미적 통찰과 활력의 지평을 차단하고 있는 형국이다. 시란 따뜻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세계의 비의를 살아있는 그대로 직시하고 발견하고 노래하는, 자재로운 언어세계라는 인식의 전환이 간곡히 요구된다.

  정숙자가 지향해야 할 시적 가장 중요한 시적 과제는 여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다음 시편의 목소리는 그 자신의 시 세계로 향할 필요가 있다.

 

  인간은 태아 적부터 물음표로 포즈를 잡는다. 삶의 준비다. 시작이다. 진행이다. 인간은 배가 고파도 추워도 꼬부린다. 묻고 있는 거다. 물어야 할 때 묻고 싶은 거다. 말은 너무 늦다. 몸이 먼저 말한다. 물을 필요가 없을 때 우리는 몸을 푼다. 쫙 펴고 눕는다. 죽음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

  -「로댕은 묻는다」일부  

  

  로댕의 대표적인 작품인 ‘생각하는 사람’을 물음표로 읽어내는 기지가 빛나고 있다. 시적 화자는 살아있음이란 끊임없이 질문하는 것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죽음은 더 이상 묻지 않는다”는 것은 묻는 행위란 살아 있음의 증거라는 사실의 강조이다.

  정숙자 시인은 이제 이러한 연속적인 물음을 적극적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향해 던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설정해 둔 시에 대한 평면적인 관념의 울타리를 스스로 돌파하는 것이 요구된다. 이때 그의 단정한 시적 문체는 생동하는 굴곡을 그리며 구체적인 삶의 현장과 호흡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체의 변화는 또한 그의 시적 사유를 삶의 빛과 그늘을 동시적이고 종합적으로 성찰하고 발견하는 통찰의 영역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그의 문체가 세상을 재발견하고 변화시키는 ‘유령 같은’ 힘으로 배회하는 모습을 기대해 본다.

 

 

  *홍용희: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 주요저서『김지하문학연구』,『꽃과 어둠의 산조』, 『아름다운 결핍의 신화』, 『그날이 오늘이라면-통일시대를 향한 남․북한 문학』등- 제4회 ‘애지문학상’ 수상, ‘제1회 젊은 평론가상 수상’-경희사이버대학교 미디어문예창작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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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지』2007/봄호 <서평, 이 계절의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