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성을 향한 발걸음
정숙자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2006,시작)
박선영/문학평론가
시집『열매보다 강한 잎』에 담긴 시편들은 소소하게 흘러가는 개인적 경험들을 정련하여 빛나는 사리로 탈바꿈시키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정숙자 시인은 고독한 대장장이처럼 내면의 용광로에 불꽃을 지피고 잡다한 불순물을 태워 순도를 높인다. 그는 이렇게 제련한 정신에 다시 정과 끌을 재고 정금 같은 언어를 조각하고자 전력투구하고 있다.
대수롭지 않게 스쳐갈 경험들도 날카롭게 벼린 인식의 칼날에 닿아 여지없이 깎여나간다. 그는 자기 몸에 채찍질을 가하는 수도자처럼 고독하게 긴장과 고통을 자청한다. 그 길은 외롭고도 엄격하다. 고통은 정신을 더욱 강하게 단련해줄만한 사유를 경험 속으로 개입시키기 위해 그가 기꺼이 불러들인 것이다. 이유도 달지 않고 찾아오는 고통이야말로 생의 원천적 부조리라 할만하다. 직접적인 자극이 가신 후에야 그 의미를 종합할 수 있다는 특성은 고통을 주체성의 핵심 요소로 자리 잡게 만든다. 불현듯 찾아오는 낯선 경험에 무방비 상태로 의식을 열어야 하기 때문이다. 받아들일 수도 회피할 수도 없는 고통은 상처를 새기고 달아나기를 반복한다. 그 상처를 사유로 승화시키려는 노력이야말로 단단한 정신을 창조해주는 자양분이라 그는 믿고 있다. 생을 볼모로 쉴 새 없이 찾아오는 부조리와 야심찬 대결을 벌이는 까닭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때문에 정숙자 시인은 “나의 대명사는 인간”(「1초 혹은 2초 사이로 지나가는 태풍」이라고 단언하며, 모든 사유는 “자신에게 밑금치고 자신을 외우”(「둥근 책」)는 것이라 정의한다. 존재에의 물음이야말로 “삶의 준비다. 시작이다. 진행이다”(「로댕은 묻는다 」)라고 확신하는 그에게 견고한 사유는 지상의 목표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몰아치는 모래바람은 별빛을 따라 사막을 횡단하는 자가 감당할 당연한 통과의례라는 듯, 그는 지나간 흔들림에 대해서 쉽게 털어놓지 않는다. 다만 “그 맑은 노래를 위해 갈대는 그렇게나 오랜 세월 나부끼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일까”(「오선의 깊이 」)라고 흔들림을 슬쩍 내비치는 정도다. 삶이 위태로운 비탈을 조심조심 걷는 과정이라면, 비탈을 넘고 더 높은 봉우리로 시야를 옮기는 것은 그 여정의 필수적인 절차이리라. 비탈길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육체와 정신을 한곳으로 집중해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이다. 그는 “실족”마저고 더 “단단한 진화를 위”(「파야 할 땅은 시간이다」)해 감수할 마땅한 과정으로 받아들이고 자신을 다스려 전진한다.
흔들리는 건 정신이 아니다
맞으면 맞을수록 의지는 더 깊이 박힌다
하지만 고뇌여, ―너무 때리지 마라
욱신거리는 침묵이 지금 이 순간에도 회색 하늘을 지나고 있다
뭉개지지 않게, 허리도 발목도 휘지 않게, 눈물도 무너지지 않게 촛불 한 자루 세워 둬 야지 그 이상의 바람은 없다 잘 잡힌 균형만이 힘을 기른다 바다가 스스로를 지켜낸 것도 제 안에 답이 있었던 거다
끝없이 밀려나오는 저 대팻밥
내면을 깎는 물보라
간절해야만, 단단해야만, 삼각파(三角波) 아울러야만 비로소 섬일 수 있다
섬을 꿈꾸는 자만이 섬에 닿는다
별똥별 사철 두고 돌아오는 곳
먹구름도 말끔히 헹궈 은빛괭이갈매기 떼로 나는 곳
외곽으로, 여백으로, 고독으로 나앉은 미래는 오늘도 오로지 용맹정진
돌 하나만 저리 굴러도 우주의 중심이 바뀌는 것을…
하물며 핏방울이 젊은 숨이랴
-「섬의 정신」전문
누구와도 나눠 멜 수 없고,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야 할 짐이라는 점에서 고독과 고통은 실존 그 자체이다. 고통의 적극적 수용은 그것에 무감각해지거나 익숙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더욱 단단해지려는 갈망에서 비롯한다. “욱신거리는 침묵”은 균형을 획득하고자 그가 얼마나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입했는지 알려준다. “균형이 잡히면 울음도 출렁거림을 벗어나는가” (「의자 위의 책」)라는 기대를 채찍삼아 수만 번의 날갯짓을 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실패를 정화의 과정에서 “밀려나오는 저 대팻밥” 같은 불순물로 넘길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얻은 균형이야말로 셀 수 없는 비상과 실패가 낳은 소중한 감각인 것이다. 자아는 바다 멀리 솟은 섬으로 다가가려 노의 균형을 잡고 파도를 다스린다. 그 항해를 위해 “촛불 한 자루”를 켠 다음 섬 한곳으로 시선을 집중한다. 이때 촛불의 가녀림은 바다의 압도적인 어둠과 냉기어린 파도를 짐작하게 한다. 오랜 시간 파도를 헤쳐 왔기에 촛불 하나에 의지해 바다를 환히 밝힐 수 없다는 것쯤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섬에 도달할 방법은 “모두 제 안에 있” (「열매보다 강한 잎」)기에 “중신을 모아 푸른빛을 고르”고 흐트러짐 없이 나아간다. 섬으로의 도달은 달리 말해 자신의 내면을 섬으로 가꾸는 일이기도 하다.
효율과 속도에 강박적으로 시달리는 이 시대에 내면을 가꾸는 것은 비생산적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질적 효율성을 추동력으로 삼아 생산량으로 가치를 평가하는 잣대는 세속적 일상사에 무관한 태도를 게으름으로 평가절하하기 쉽다. 이에 그는 세상의 우선순위에서 자발적으로 밀려나와 “외곽으로, 여백으로, 고독으로 나앉”는 게으름을 선택한다. 게으름이야말로 “사유의 세계로 달리는 제1번 국도”(「멈춤 상상의 속도」)라고 믿기 때문이다. 온전히 침묵과 고요함만으로 채워진 게으름은 “거듭거듭 다친 이들”의 “하염없는” 눈길을 얻게 한다. 자아는 정관(靜觀)하는 시간을 소중하게 가꾸며 내면의 봉우리를 향해 다시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발이 머리로 들어온다
우울한 발은 머리로 들어올 수밖에 없다
안개에 질리고, 바람에 막히고, 소신만이 푸른 발
사유 속으로 진입한 발은 하늘로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다
더 이상 신발이 닳지 않는다
길을 재지도 않는다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린다
발이 창공으로 날아간 순간 길은 원시림으로 돌아간다 온 만큼만 돌아가면 태초다
길에서 발이 여문다
벗어남/체념/전락이라고 짚어도 좋다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고독 속에서 한 순배 익어 가는 발
지나온 시간들이 압축된다
다시 씨앗이다
꽃을 지닌 떡잎이 지상으로 뻗어나간다
-「한 바퀴」전문
위의 시는 근원적 “씨앗”을 찾아 정신의 심해로 탐사선을 내려보내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대로 영근 씨앗만이 찬란한 꽃을 품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가 찾은 씨앗은 견고한 껍질 속에서 “꽃”의 꿈을 꾸며 “떡잎”으로 뻗어나간다.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야말로 이러한 발걸음 가볍게 해주는 동력일 것이다. 내면으로의 침잠은 “지나온 시간들”을 “압축”시키며 태초를 향해 한걸음 더 다가가게 한다. 그는 자기 안으로 향한 여행을 “벗어남/체념/전락이라고 짚어도 좋다”며 “사유 속으로 진입ㅂ한 발”에 기꺼이 몸을 내맡긴다. 사실 일상이 혼란과 잡념으로 분주할 때는 아무리 곧게 걸으려 애써도 발자국은 늘 어지럽게 흩어져 버린다. 그러나 불국의 의지를 갈망하는 정신은 고요함과 명상을 나침반삼아 다시금 정방향을 추구한다. 절대적인 광채에 사로잡혀 “걸음걸이마저 잊어버”리고 다가가자 주변의 유혹은 어느새 사라진다. 사유의 고요한 영지로 편안하게 침잠한 자아는 쓸모없는 말을 삼가고 침묵을 지팡이삼아 거닌다. 그리고 “아무도 따라올 수 없는 고독 속”으로 더욱 깊이 진입하려한다. 태초의 시간을 한 바퀴를 돌아 제자리로 돌아왔을 때, 그 발은 이미 차원 높은 경지를 찍고 “한 순배 익”어 있다.
정숙자 시인에게 고통은 그것과 한 치의 양보 없이 맞붙어 사유로 증류될 때 비로소 의미를 획득한다. 부조리라는 근원적 조건을 정직하게 파고드는 모습에서 빛나는 열매들이 매달린 미래를 떠올릴 수 있다. “고도로 압축‘정화된 언어”(「문인석」)를 얻기 위한 노력은 불굴의 금속성의지라 부를 만하다. 우직할 정도로 한 지점만을 바라보고 가는『열매보다 강한 잎』속 시편들은 첫 장의 기대를 크게 거스르지 않은 채 끝까지 나아간다. 격정을 토로하는 여타의 시들 사이에서, 견고함을 반듯하게만 담아내려는 시도는 자칫 단조롭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했던 이 여정이 끝날 무렵, 그 길을 엿보던 이들은 시인의 걸음이 벌써 아득한 곳에 도달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박선영/ 2004년『현대시학』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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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리토피아> 2006-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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