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고 시인의 시

김동원_한(恨)과 가락(발췌)/ 신부 : 서정주

검지 정숙자 2022. 9. 7. 02:16

 

    신부

 

    서정주(1915-2000, 85세)

 

 

  신부는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신랑하고 첫날밤을 아직 앉아 있었는데, 신랑이 그만 오줌이 급해져서 냉큼 일어나 달려가는 바람에 옷자락이 문 돌쩌귀에 걸렸습니다. 그것을 신랑은 생각이 또 급해서 제 신부가 음탕해서 그새를 못 참아서 뒤에서 손으로 잡아다리는 거라고, 그렇게만 알곤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가 버렸습니다. 문 돌쩌귀에 걸린 옷자락이 찢어진 채로 오줌 누곤 못 쓰겠다며 달아나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사십 년인가 오십 년이 지나간 뒤에 뜻밖에 딴 볼일이 생겨 이 신부네 집 옆을 지나가다가 그래도 잠시 궁금해서 신부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니 신부는 귀밑머리만 풀린 첫날밤 모양 그대로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로 아직도 고스란히 앉아 있었습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어 그어깨를 가서 어루만지니그때서야 매운  재가 되어 폭삭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초록 재와 다홍 재로 내려앉아 버렸습니다.

    -전문-

 

  과 가락_주제로 읽는 한국 현대시(발췌) _김동원/ 문학평론가

  「신부」 어리석은 한 남자의 오해로 빚어진 초야의 신혼 밤이 그대로 주검이 된 여인의 한을 읊었다. 미당은 매 시편마다 시의 주제를 온전히 장악했다. 시 행간 속에 놀라운 시적 감각과 사유는 독특한  리듬으로 살아 꿈틀거린다.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무엇을 쓰려고 집착하지 않는 반면, 쓰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하늘이 내린 천명의 소리가 들린다. 아름다움이 있는가 하면 삶의 골목이 있고, 시적 허구로 가득 차 있는가 하면, 영원성에 닿아있는 시적 상상력은 천의무봉이다. 전라도 사투리에 스며있는 어조, 속도, 고저, 음색, 장단, 강약을, 미당만큼 잘 부려 쓴 시인이 또 있을까. 마치 서해 뻘밭 위에서, 밀물의  은빛 달빛 흐름에 맞춰 홀로 춤추는 듯하다. 한국 현대 서정시는 미당에 와서야 비로소 그 아름다운 시의 판도라 상자가 한꺼번에 열렸다.

  「신부」의 요체는 유교적 도덕관에 얽매인 여필종부의 희생과 굴종을 한의 미학으로끌어 올렸다. 시간적 흐름에 따라 서사적 기법을 취하고 있으며, 3인칭 시점이 특이하다. 마치 재담꾼이 옛이야기를 곁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독자들의 영혼을 파고든다. 혼례복인 "초록 저고리", "다홍치마"는 음양의 조화와 젊은 신부의 고움을 상징한다. 초록과 다홍의 강렬한 시각적 대비는, 이 시의 비극을 극대화하였다. "겨우 귀밑머리만 풀리운 채" 한없이 외롭게 앉아 죽어간, 이 땅의 모든 고달픈 여인은 은유적이다. 왜 미당은 신부를 첫날밤 모습 그대로 원혼이 되게 했을까. 신랑의 무지에 대한 야속함일까. 아님, 양반 사대부의 일방적 허구에 일침을 놓은 것일까. 죽음으로써 정절을 지킨 첫날 밤 신부를 통해 미당이 독자에게 일갈한 뜻은, "매운 재"에 이르러서야 "폭삭" 내려앉는다. 한국 여성에 대한 남성 중심 사회의 그 무지함은 "초록 재와 다홍 재"로 서럽게 상징화 되었다. 이런 설화 속 여인의 일생을 미당은 무척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살아생전 억울했던 원귀의 원을 풀어서, 죽은 후에는 원한怨恨없이 순수한 생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서정주는 「신부」를 통해 비극적으로 직조하였다. (p. 시 231/ 론 231-232)

 

   --------------------------- 

   * 『시와사람』 2022-가을(105)호 <주제로 읽는 한국 현대시>에서

   * 김동원/ 1994년『문학세계』로 시, 2017년《매일신문》신춘문예로 동시, 2020년 《문장 21》로 평론 당선, 시집『시가 걸리는 저녁 풍경』『구멍』『처녀와 바다』『깍지』, 시선집『고흐의 시』, 시 에세이 집『시, 낭송의 옷을 입다』, 평론집『시에 미치다』, 동시집『우리 나라 연못 속 친구들』『태양 셰프』, 시평론 대담집『저녁의 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