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김영랑(1903-1950, 47세)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봄을 기둘리고 잇슬테요
모란이 뚝뚝 떠러져버린날
나는 비로소 봄을여흰 서름에 잠길테요
五月어느날 그하로 무덥든날
떠러져누은 꼿닙마져 시드러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최도 업서지고
뻐처오르는 내보람 서운케 문허젓느니
모란이 지고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말아
三百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잇슬테요 찰란한슬픔의 봄을
-전문-
◈ 김영랑의 셋째 아들 김현철은 아버지를 추억하고 추모하는 글을 모아 『아버지 그립고야』(동아일보사, 2010)를 출간한다. 자신의 기억과 영랑의 문우들 그리고 고향 분들의 고증을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 33편을 엮은 책이다. 그중 첫 번째 에피소드 「미인의 사진을 보고 감격의 눈물을」이 눈길을 끈다.
영랑이 일본 아오야먀학원(현 靑山學院大學,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재학 시절(1920~1923), 프랑스 여배우 미뇽(Mignon)의 그림엽서 한 장을 구했는데, 그 청순하고 요염한 미인의 사진을 보고 너무 감격해서 "이 미인의 모습 때문에 내 청춘이 병들었노라." 하며 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림엽서 뒤에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고 한다.
달밤에 이슬아침에
내 미뇽을 안고
울기를 몇 번이든고
청산은 내 청춘을
병들게 하였거니와
오히려 향내를
뿌리워 준다
시를 외이든 때 싯적이든 때
눈물을 눈물로 맞이려든 때
그때에 청춘은 병들었으나
한 그릇 향훈은 늙지를 않네
-「달밤에 이슬 아침에」 부분( 『아버지 그립고야』, 19쪽)
김현철은 이 일화에 대해 "유미주의파 시인의 내심이 들여다보인다. 이토록 아름다움에 약한 영랑은 첫 시집인 『영랑시집』 첫 페이지에 'A thing of beauty is joy, forever(아름다움은 영원한 기쁨)'라는 존 키츠(John Keats)의 명시 구절을 원문 그대로 인용하기도 했다."라고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후 십여 년이 흘러 소개한 에피소드가 일정한 시 형식을 갖추게 된 것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의 모란이 "단순히 봄에 피는 식물로서의 모란이 아니라 인간 범사에 걸쳐 우리들이 추구하는 지순의 세계, 최고 가치의 세계를 상징한다."(이숭원, 『영랑을 만나다』, 태학사, 2009, 179쪽)고 하면 '미뇽'도 의미론적으로 '모란'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연구자들에 의해 확립된 모란의 의미를 대전제로 모란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를 연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역으로 모란의 의미를 귀납해 나갈 수 있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청산학원 시절 영랑의 눈물이 「모란이 피기까지는」으로 완성되는 10여 년의 기간은 우리 시의 형성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이국 여배우에 대한 막연한 동경에서 출발하여 다다른,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음악적 율동감, 시상 전개 양식, '모란과 봄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소재를 통해 인간의 보편적 감정과 삶의 본질적 조건을 형상화'(이숭원, 위의 책, 180쪽)한 주제론적 성취는 우리 시 형성과정의 주요한 국면을 이룬다. ▩ (p. 6-8)
* 블로그주: "프랑스 여배우 미뇽"의 사진과 "영랑이 미뇽을 생각하며 친필로 쓴 시"는 책에서 일독 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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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딩아돌하』 2022-여름(63)호 <우리시 다시 읽기>에서
* 박순원/ 충북 청주 출생, 2005년『서정시학』 겨울호 신인상, 시집『아무나 사랑하지 않겠다』『주먹이 운다』『그런데, 그런데』『에르고스테롤』『흰 빨래는 희게 빨고 검은 빨래 검게 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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