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커튼을
이승훈(1942-2018, 76세)
흔들리는 커튼을
젖히고
나는 들어간다.
훌랫시를 비취어도
찾는 선반은 없고
눈에
조그마한 꽃병은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고
탁자와
삐걱대는 의식의 바다에서
나는 귀가 시렸다.
창밖에는 눈보라 밤
몇 시였는지 모른다.
실내를 조용히 벗어나며
금이 가는 상상의 캄캄한 정원에서
나는 울고 있었지만
시방 보이지 않는 방으로
들어간다.
새벽 바다에 달이
지고 있었다.
어디선가 무수히 흔들리는 커튼이 있었다.
-전문 (p. 79-80)
▶모더니즘 실험가 이승훈, 그는 시인이다(발췌) _김미연/ 문학평론가, 진주교대 강사
시인 이승훈(1942~2018, 76세)은 강원도 춘천에서 출생하여 춘천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사,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이어 연세대 박사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를 받았다.그는 춘천교대 교수를 거쳐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정년하는 가운데 월간『현대문학』에 시 『낮』, 「바다」, 「두 개의 추상」이 박목월에 의해 추천(1962-1963)됨으로써 등단하게 된다.
그는 시집으로 『사물A』, 『환상의 다리』, 『인생』, 『비누』, 『이것은 시가 아니다』, 『이승훈 시전집』등 20권을 내었고 시론집으로 『반인간』, 『시론』, 『포스트모더니즘 시론』, 『한국현대시론사』, 『이승훈의 아방가르드 산책』 등 22권을 출간했다.
수필집으로 『모든 섬은 따뜻하다』 등 5권, 번역서 『문학의 이론』(엘리스) 등 2권, 기타 『문학 상상 사전』 등 2권을 내보였다. 저술로만 보아도 그는 한국시단의 특별한 얼굴로 각인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p. 72)
화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의식의 방을 들어가고 있다. 방에서 선반을, 꽃병을 찾고 있는데 필요한 것은 찾아지지 않는다. 방에는 의식의 바다라 귀가 시린 상황이다. 밖에는 눈보라 추위, 상상의 정원에서 '나는 울고 있다'는 것이다. 들어간 방은 보이지 않는 방, 달이 지는 새벽이고 커튼이 흔들리고 있다. 이 시는 구체적인 대상이 없는 비대상, 무대상의 시다. 시에서 '나'는 귀가 시린 추위 속에서 흔들리는 커튼처럼 의식의 가위눌림에 울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라는 존재에겐 주어지는 것이 없다. 다만 울고 있기만 할 뿐이다. 젊은 시절이 춥고 시린 나날을 살아낸 실존인 것이다. (p. 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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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네르바』2022년 가을(87)호 <현대 시인 열전 -17> 에서
* 김미연/ 2015년월간문학』으로 문학평론 & 『월간문학』으로 시조 부문 등단, 시집『절반의 목요일』, 평론집『문효치 시의 이미지와 서정의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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