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한 편

오민석 에세이『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

검지 정숙자 2022. 8. 8. 17:49

<에세이>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

 

    오민석

 

 

  인피니튜드* 앞마당의 자줏빛 사계국화꽃들이 태양을 향해 일제히 옆으로 쏠려 있다. 느티나무 그늘을 피하려는 아우성이다. 햇빛이 잘 드는 할아버지의 집 현관 오른쪽에 있는 채송화들은 똑바로 서 있는데, 그 모습이 색색의 연필로 가득 찬 크레파스 통 같다. 채송화들은 저녁이 되면 꽃잎을 닫았다가 아침이면 다시 문을 연다. 꽃의 운동성을 지배하는 것은 태양이다. 꽃들은 햇빛의 향방에 매우 민감하다. 마치 태양신을 숭배하는 사제들 같다.

  어제는 단국대학교에서의 강연 때문에 먹실골을 잠시 떠났다. 죽전 집에 오니 아파트 안에 오가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마스크로 중무장을 하고 있다. 오랜만에 산속에 있다 나오니 이런 풍경이 낯설다. 포스트 코로나의 시대임을 절감한다.

  강연의 제목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는 법 : 책 읽기의 힘'이었다. 스펙을 쌓는 일 때문에 책 읽기가 뒷전으로 밀려있는 시대에도 책을 놓지 않는 청년들이 여전히 있다. 저들이 세상을 키워갈 것이다. 마스크를 쓴 채 진지하게 내 강연을 경청하는 청년들이 대견하고 든든하다. 그 모습이 하도 아름다워 정해진 시간을 훨씬 넘겨 떠들다 보니 시간이 '오버'되었다는 주최 측의 사인이 날아온다. 항상 '오버질'이 문제다.

  강연이 끝나고 집에 오니 딸애가 나를 동네 최고의 갈빗집에 데려가 저녁을 사준다. 처음 있는 일이다. 첫 월급을 받았단다. 식사 후 집으로 돌아오니 이번에는 봉투를 내민다. 앞면에는 봉투 가득 큰 글자로 "평생 효도", 뒷면에는 작은 글자로 "약속 지킬게요"라고 쓰여 있다. 둘이서 깔깔거리고 웃는다. 봉투  안에 제법 큰 돈이 들어있다. 나는 괜스레 "한 두어 장 더 넣지 그랬어"라며 낄낄거린다. 오늘따라 퇴근이 늦어 함께 자리를 못한 사위를 위해 여분의 갈비를 포장해왔다. 이것은 물론 내가 계산했다. 잠시 후 나는 다시 먹실골로 들어간다. 아,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  (p. 166-167)

 

  * 철학자 에마뉴엘 레비나스E. Levinas의 '무한성'에서 빌려왔다. (편집자 주)// ※ 편집자의 오두막 이름. (블로그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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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민석 에세이 『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에서/ 2022. 6. 15. <뒤란>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창간 기념 신인상 시 부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경계에서의 글쓰기』『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시와경계 문학상, 시작문학상 수상. 현)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