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책상 위에서
도래할 세계
오민석
K가 드디어 책상을 완성했다. 그제엔 도우러 갔다가 구경만 하고 올라왔는데, 어제는 그래도 일을 좀 했다. 책상을 다 짠 후 K가 의자를 만들기 위해 나무를 자르는 동안 원목 책상에 투명한 오일스테인을 발랐다. 붓이 자나갈 때마다 나뭇결이 더욱 선명해진다. 붓은 돋보기처럼 나무의 속살을 앞으로 당기며 또렷이 드러낸다. 샌드페이퍼로 갈아 비단처럼 부드러워진 나무의 촉감이 시각의 층위로 서서히 옮겨진다.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나무 안에 숨어있던 이데아Idea는 점점 더 물질성을 갖게 되고, 정신은 천천히 최고의 집중 상태를 향해 간다. 그림을 그릴 때와 매우 유사한 과정이다. 목공일에는 그 자체의 쓸모와 무관한 쾌락이 있다. 고막을 찢는 듯한 전기톱 소리, 드라이버로 나사를 박을 때 작은 구멍에서 나무의 세포들이 파열되는 느낌,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무와 나무가 연결되는 순간의 짧은 환희, 샌드페이퍼 기계로 나무의 표면을 갈아낼 때 작은 폭풍처럼 빠르게 휘날리는 톱밥. 이 모든 과정은 이데아를 실물로 만드는 근육의 힘과 정확한 감각, 그리고 놀라운 집중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것은 매우 창조적이며 야생적이다. 그리하여 어떤 목수들은 작업의 작은 단계가 끝날 때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모를) 욕설을 무슨 추임새처럼 넣기도 하는데, 그것은 사실 욕이 아니라 자신이 이룬 완성의 어느 단계에 타져 나오는 '탄성' 같은 것이다.
작업이 끝나자 K의 트럭에 책상과 의자를 싣고 먹실골 오두막으로 올라왔다. 임시로 사용하던 티 테이블을 끌어내고 책상과 의자를 들여놓았다. 그것들은 순식간에 작업장에서의 아우라Aura를 버리고 새로운 존재로 재탄생한다.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 이미 거기에 앉아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다. K와 책상 한 귀퉁이에 이런 문장을 써넣기도 했다. "On this desk, a new world will be opened." 나는 우리 세대가 모두 저문 멀로 먼 훗날에 K의 자손들이 이 문장을 보고, K가 이 책상을 만들 때의 생각과 느낌, 그리고 K의 호의로 이 책상 위에서 무언가 "새로운 세계"을 열기 위해 날새워 낑낑거리던 한 작가를 기억하는 상상을 했다. 그들에게도 그들만의 도래할 '새로운 세계'가 필요하겠지.
K와 주현미를 틀어놓고 젓가락을 두드리며 노래를 몇 곡 따라 불렀다. 누가 들으면 만취 상태를 연상하겠지만, 우리는 고작 작은 막걸리 한 병씩을 마셨을 뿐. 그러므로 우리의 젓가락 장단은 물리적 취기가 아니라, 야생의 자유와 성취의 기쁨에서 저절로 터져 나온 것이다. K의 작품을 보기 위해 K의 부인이 올라왔고, 그래서 성과의 기쁨은 더욱 배가되었다. K 부부가 내려간 후, 간단히 콩국수를 말아 저녁을 먹었다. 초저녁 잠을 자고 일어나 마감을 하루 넘긴 원고에 달려든다. ▩ (p. 163-165)
-----------------
* 오민석 에세이 『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에서/ 2022. 6. 15. <뒤란> 펴냄
* 오민석/ 충남 공주 출생, 1990년 『한길문학』 창간 기념 신인상 시 부문 & 199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부문 당선, 시집『굿모닝, 에브리원』『그리운 명륜여인숙』『기차는 오늘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평론집『몸-주체와 상처받음의 윤리』. 문학이론 연구서『현대문학이론의 길잡이』『정치적 비평의 미래를 위하여』. 문학연구서『저항의 방식: 캐나다 현대 원주민 문학의 지평』. 대중문화연구서 송해 평전『나는 딴따라다』『밥 딜런, 그의 나라에는 누가 사는가』. 시 해설서『아침 시: 나를 깨우는 매일 오 분』. 산문집『경계에서의 글쓰기』『개기는 인생도 괜찮다』. 번역서 바스코 포파 시집『절름발이 늑대에게 경의를』 등. 단국문학상, 부석 평론상, 시와경계 문학상, 시작문학상 수상. 현) 단국대 영미인문학과 교수.
'에세이 한 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른 목선(木船)에 기대어/ 오민석 (0) | 2022.08.08 |
---|---|
오민석 에세이『나는 터지기를 기다리는 꽃이다』/ 금세 그리워지는 것들 (0) | 2022.08.08 |
조선시대 문인들이 애호한 악기, 거문고/ 송지원(음악인문연구소장) (0) | 2022.06.09 |
지렁이가 기어간 자국/ 진기환(중국고전번역가) (0) | 2022.05.29 |
내가 사는 집/ 사공정숙 (0) | 2022.05.0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