깍지의 시간
김휼
연필을 깎으며 생각했어요
거꾸로 읽어도 만나게 되는 우연한 것들의 필연 말이에요
겨우 손 안에 잡히는 뭉툭한 길이로
빛나는 생을 살다 간 당신
허리가 닳도록 굽은 뜻 세워주신 육각의 방식은 눈물겨웠죠
마른침 묻혀가며 분절된 말들을 옮겨 적던 겨울밤
불빛 아래로 모여들던 꿈은 어디서 자라고 있을까요
힘주어 쓴 글씨가 뚝, 부러진 후
바닥까지 내려갔던 그 밤을 몰래 소환해보곤 해요
시한부적인 삶에선 불안도 힘이 되는 걸까요
어떤 글은 칼이 되어 악몽을 도려내기도 한다는데
닳아진 마음에 깍지를 끼고 하루를 버텨요
흑심이 흘린 눈물로 밤마다 문장을 버무렸어요
창조는 태초에만 있는 게 아니더군요
실마리가 풀린 문장들이 그림자를 달고 되살아났어요
미숙한 몸으로 나를 떠난 언어들이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날개를 달기도 하였죠
깍지의 시간을 돌아 나온 나는 당신의 얼룩
삐뚤거리던 내 청춘이 비로소 정렬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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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래시학』 2022-여름(41)호 <미래시학 시단Ⅰ>에서
* 김휼(본명: 김형미)/ 2007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 2017년『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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