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제23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작품론> 中
오늘은 없는 색
김중일
물이 고이는 곳에서 물때가 끼듯 매일 공기가 고이는
사실상 세상 모든 곳에는 때가 낀다, 녹이 슬거나 주름이 지거나
꽃이 피거나.
또 하나의 심각한 찌든 때는 빛 때문에 생긴다.
햇빛이 고이는 곳에는 무엇보다 시커먼 때가 낀디.
빛이 빠져나가면 미끌미끌한 어둠이 잔뜩 껴 있는 걸 알 수 있다.
땅거미와 나는 공생 관계다.
내 몸 곳곳에 낀 빛의 시커먼 때를, 땅거미가 한발 미리 내려와 매일 밤새 머리부터 발끝까지 깨끗이 청소해 준다.
그 청소가 한창일 때
나는 빛에 찌든 때가 앞서 완벽히 청소된 '유일한 곳'에 간다.
사랑하는 너와 함께 있던 그곳에 너는 이제 없는 것과 같다.
그곳은 기억 속일까 아니면 꿈속일까, 하지만 그건 너무 흔한 추측인 걸, 매 순간 의심하며
청소가 끝나길 기다린다, 기다리다 깜박 잠이 든다, 물론 두 눈을 감고
심지어 두 눈을 감고 있는 순간에도
우리는 매일 '기억' 속에 찌든 때처럼 낀 우리를 보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네가 공허한 시선을, 창밖으로 던지며 한숨을 폭 내쉬고, 다시 책 속으로 거두며 정확히 그만큼의 숨을
들이마실 때, 나는 네 몸속으로 몰래 슬쩍 빨려 들어갔다가
한숨이 되어 도로 빠져나온다.
내 추억의 게임이다.
결국은 너의 기억에 낀 가장 오래된 때는 '너'다
결론은 나 자신이 내 기억에 낀 지워지지 않는 때였던 것처럼.
한때 나는 '네'가 내 기억에 잔뜩 낀 닦이지 않는 때인 줄만 알았다.
눈물 고인 모든 오늘은 어제와 내일 사이에 낀 물때.
오늘은 어제와 내일을 반반 섞으면 띠는 색.
오늘은 알 수 없는 색이다.
오늘은 나의 생일이다.
생일은, 기다리던 퇴원 날.
다인실 옷걸이에 걸린 몸을 집히는 대로 입고 나온 날.
그날부터 몸과 마음따라 변해가는 색.
요람에서 무덤까지 세월에 꼭 맞게 늘어났다가 줄어들었다가
한 움큼씩 먼지가 되는 몸.
물이나 빛이나 공기가 평생 고인 몸.
'나'는 물과 빛과 공기가 고인 나에게 낀 때.
세상에 없는 색의 때.
내게 묻은 '나'라는 찌든 때를 한때나마 닦아준 사람을 사랑한다.
나를 무색하게 하는 일을 한 그 사람을.
어떤 바람도 없이
내 생일을 기억하는 너와 같은 사람을.
-전문-
* 심사평: 오형엽 김언 조강석 안지영
▶ 몸 없는 살갗의 노동(발췌) _이철주/ 문학평론가
때때로 김중일의 시에서 살핌의 노동은 "땅거미"로 찾아오는 밤의 망각에 의해 대신 수행되기도 한다. 누군가 잠시 머물렀다 떠나간 곳, 따뜻한 빛이 단 한 번만이라도 고였다 사라진 곳이면 어디든 예외 없이 "시커먼" 때가 "미끌미끌한 어둠"이 걷잡을 수 없는 속도로 자라난다. 화자는 밤이 공평한 어둠이 자신의 몸 곳곳에 낀 부재의 잔재들을 "깨끗이 청소해"줄 거라 믿으며 "빛에 찌든 때가 앞서 완벽히 청소된 '유일한 곳', 즉 너와 머물렀던 사랑의 자리를 아무런 미련도 없이 방문할 수 있다 확신하지만, 너의 흔적을 온전히 지웠음을 힘주어 강조하고 싶어 하지만("한때 나는 '네'가 내 기억에 잔뜩 낀 닦이지 않는 때인 줄만 알았다."), 그럴수록 더 선명히 드러나는 것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너라는 부재의 깊이이다. 밤의 망각을 신뢰했던 화자가 오래된 부재의 때를 닦아내는 밤의 노동 속에서 결국 도달하게 되는 곳이 "내게 묻는 '나'라는 찌든 때를 한때나마 닦아준 사람"에 대한 사랑이며 부재로서 존재하는 살핌의 기억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 할 수 있다. (p. 시 128-130 / 론 167-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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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 2022-5월(389)호 <제23회 현대시작품상 특집/ 작품론> 에서
* 김중일/ 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국경꽃집』『아무튼 씨 미안해요』『내가 살아갈 사람』『가슴에서 사슴까지』『유령시인』『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 이철주/ 문학평론가, 201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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