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안암동 6 외 1편/ 이경림

검지 정숙자 2022. 6. 25. 01:56

 

    안암동 6 외 1편

     -모르는 길

 

    이경림

 

 

  어디선가 자꾸 습기가 올라와 얇은 옷을 적셨다 문밖에는 키 큰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귀뚜라미 소리가 맨몸으로 산비탈을 내리굴렀다 교회 마당 감나무에는 잘 익은 절망 같은 것들이 가쟁이가 휘어지게 열렸다 종지기는 시도 때도 없이 종을 쳤다 종소리에 부딪쳐 집들은 자꾸 금이 기고 갈라진 흙벽 틈새로 바람이 불어와 방안을 휮벗고 다녔다 심장병에 걸린 동생의 가슴에 불이 점점 흐려졌다 밥 짓는 연기가 힘겹게 흐린 하늘로 끌려들어 가는 것이 보였다 낯모르는 길들이 벌떡벌떡 일어서서 걸어오고 햇빛이 자꾸 언덕배기에서 미끄러졌다 고통은 산그림자보다 크고 그 그림자에 산이 휩싸였다

 

  눈이 왔으면 아 거짓말처럼

  눈은 산그림자를 덮고

  산은 눈 위에 가볍게 떠올랐으면

      -전문(p.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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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리마

 

 

  벽에 붙은 지도 위를 그리마가 한 마리 간다

  아메리카를 지나 태평양의 한가운데 서서

  잠시 위풍스런 상체를 휘휘 두르다가

  덥석 아시아로 상륙한다

 

  그리마의 발가락 사이에서 신음하는 아시아

  그리마의 발가락 털의 그 황홀한 감촉으로

  아시아의 여자들은

  물로 녹아 바다로 흐르고

  팽팽하게 살찐 태평양의 표면장력이 된다

 

  옷자락만 남아서 펄렁이는 아시아

 

  그리마의 발톱에 눌린

  모래알만 한 사내들의 모래보다 작은

  수천 개의 심장만이 뛰쳐나와

  잿빛 하늘 속으로 익사한다

 

  나는 그리마를 잡으려고 손을 높이 쳐들었으나

  그림자뿐이었다

     -전문(p.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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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개정판) 『토씨찾기』에서/ 2022. 5. 26. <문학동네> 펴냄   

   * 이경림/ 1989년『문학과비평』으로 등단, 시집『토씨찾기』『그곳에도 사거리는 있다』『시절 하나 온다, 잡아먹자』『상자들』 『내 몸속에 푸른 호랑이가 있다』『급! 고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