젖은 것들의 무늬
임지나
1
손가락 한 마디 길이의 비가 온다 규칙적인 차가운 자극, 주위는 손가락에 떠밀려 독려하며 습습해져 갔다 줄기차게 내 몸 두드린 자를 잊지 않아서 그 진한 기억을 몸에 넣듯 커피는 식도를 넘어간다
2
빛나는 바늘들이 떨어진다 바늘귀로 숱한 부사副詞를 내놓는다 나뭇잎은 바늘을 두 팔로 받고 있다 나무는 울울창창해졌다 햇빛을 그리워하지 않은 채
3
걷자, 실비집 로스 경양식 돈까스집은 어디 있지? 유적 같은 추억은 쏟아져라 빗방울이 모던할 때까지 비 오는 날 생기는 내 무늬를 들고 내 모양을 들고 무늬를 돌리고 모양을 돌리고 무늬가 튀고 모양이 튀고 옆 사람에게 튀지 않게, 가장 오래된 샤워를 즐겨야지
-전문-
해설> 한 문장: "비 오는 날 생기는 내 무늬"라는 표현 속에는 사랑했던 사람과의 이별과 그 후의 심적 고통의 상흔이 새겨져 있다. 그러니까 시적 논리에 따르면 차갑게 내리는 비는 "줄기차게 내 몸을 두드린 자"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사람은 나뭇잎에 "빛나는 바늘"로 떨어지는 빗방울처럼 내 몸을 찌르며 아픈 기억을 환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까 떨어지는 빗방울은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질 수밖에 없었던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하면서 여전히 바늘이 피부를 찌르는 듯한 고통을 발산하고 있는 셈이다. 그래서 「젖은 것들의 무늬」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의 고통과 상처를 함축하고 있는데, "무늬를 돌리고 모양을 돌리고 무늬가 튀고 모양이 튀고"라는 표현처럼 시적 주체는 그 고통과 상처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다. "가장 오래된 샤워를 즐겨야지"라는 대목을 보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그것에 어떤 형상과 무늬를 입히기 위해서 그것을 오랫동안 붙잡고 음미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통과 상처를 붙안고 형상을 부여하려는 시도는 그것에 합당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여 전유하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전유의 노력이 '무늬'라는 이미지에 응축되어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상실과 고통의 기억이란 트라우마와 같은 것이어서 쉽사리 장악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p. 시 23/ 론 117-118) (황치복/ 문학평론가)
--------------------
* 시집 『네가 오는 시간은 연시』에서/ 2022. 6. 13. <상상인> 펴냄
* 임지나/ 2015년『시와소금』으로 동시 & 2017년 ⟪영주일보⟫ 신춘문예로 & 2019년『시와 경계』로 등단, 동시집『머그컵 엄마』『꼬리 흔드는 아이』, 한국동시문학회 회원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 버릇/ 이명선 (0) | 2022.06.20 |
|---|---|
| 거룩하지 못한 밤 외 1편/ 임지나 (0) | 2022.06.19 |
| 나를 막지 말아요 외 1편/ 정채원 (0) | 2022.06.18 |
| 비로소 꽃/ 정채원 (0) | 2022.06.18 |
| 다시 세상을 품다 외 1편/ 홍신선 (0) | 2022.0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