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간 2
이채민
마치 파혼을 선언하듯
왼쪽 팔이 나를 떠나 정물처럼 오만하다
내가 모르는 천 개의 표정을 바꿔가며
낮과 밤의 모든 규칙을 학대한다
나의 일부는 살해되었고
억울하고 고독하고
사방이 섬이다
입고 벗는 일마저 격렬하고 날카롭다
천국의 입술은 한 발 떨어져 있고
비는 일요일의 눈물을 대신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유서를 돌돌 말아
나로부터 멀어지는
고독한 손가락에 끼운다
나는, 나를 모르는 타자가 되고
창틀에 매달린
유품처럼
모든 비를 맞는다
8,760시간이 지나고 있다
-전문-
해설> 한 문장: 끝내 시인은 "버지니아 울프의 마지막 유서를 돌돌 말아, 저 '왼팔'의 손가락에 끼운다. 마음을 열어야 마음이 들어올 수 있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도덕률 때문이지만, 적어도 충분한 열의를 보여야 파국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상황은 분명치 않고 요원하다. 시인은 살과 뼈가 끊어지고, 분리되는 지독한 '펜데믹'을 보내고 있을 뿐인바, "창틀에 매달린 유품처럼/ 모든 비를 맞"아야 하는, 나조차도 나를 모르는 소외된 타자들이 창궐하고, 주체를 대상으로부터 끝없이 분리시키는 막중한 빈곤이 그 실체를 주관한다. 그 속에 '나'는 없다. 사실 펜데믹의 진짜 문제는 "불확실성 속에서 삶이 그저 지루하게 이어지며 항구적인 우울증을 유발하고 버텨내려는 의지를 상실히게 만든다"6)는 것이 아닌가. (p. 시 48-49/ 론 118) (박성현/ 시인)
6) 슬라보예 지젝, 강우성 옮김, 『잃어버린 시간의 연대기』, 북하우스, 2021, 13쪽.
--------------------
* 시집 『까마득한 연인들』에서/ 2022. 5. 30. <현대시학사> 펴냄
* 이채민/ 충남 논산 출생, 2004년『미네르바』로 등단, 시집『동백을 뒤적이다』『빛의 뿌리』『오답으로 출렁이는 저 무성함』
'시집에서 읽은 시'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봄 호밀/ 차옥혜 (0) | 2022.06.12 |
|---|---|
| 청동나비 외 1편/ 이채민 (0) | 2022.06.10 |
| 뼈를 위한 레퀴엠/ 이향란 (0) | 2022.06.06 |
| 그림자밟기 외 1편/ 지연 (0) | 2022.06.04 |
| 울음은 색실누빔으로 작약을 키운다/ 지연 (0) | 2022.06.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