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박동억_나란히 걷는 시간(발췌)/ 모넴바시아 : 이승예

검지 정숙자 2022. 6. 6. 14:33

 

    모넴바시아

 

    이승예

 

 

  지진에 흔들리며, 흔들리며 다짐했나

  대륙에서 떨어져 나가 물고기가 되어야지

 

  돌계단을 오르다 지붕 사이로 셔터를 누르면

  저문 중세의 풍경들이 화각 안으로 모여든다

 

  십자가에 박힌 못 자국 속으로 지는 해를 본다

 

  뺏기고 뺴앗았던 시간의 반복을 견뎌와

  끝내 살아남아 피어나는 꽃들은 물고기의 꿈을

  섬세하게 섬의 역사로 기록하는지

 

  경건한 시간에 찾아오는 것은 오직 모넴바시아*

  이곳으로의 진입은

  절박하게 절벽을 걷듯 스스로 고난을 지고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는 당신과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다 되돌아가는 당신과

 

  모두 차별 없이 저물어 가시지요

 

  나는 하룻밤 묵으며 흔들림은

  생을 조금 더 허락한 거라는 지느러미의 불립문자를 읽는다

 

  간밤 내내 손바닥을 통과하여 이제 막

  십자가를 뚫고 나온 못 끝이 시작이 되는 해가 밀려 나오는 일

 

  손바닥을 이마에 대고 해를 가린다

  에게해 쪽으로 방향을 튼 물고기를 향해

  일제히 몸을 돌려 가파르게 흔들리던 꽃잎은

  오늘 무사하다

     -전문-

 

   * 모넴바시아: 오직 하나의 입구

   *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동쪽에 위치한 작은 섬

 

  나란히 걷는 시간_이승예 시인의 시(발췌) _박동억/ 문학평론가 

  신작시 「모넴바시아」는 『언제 밥이나 한 번 먹어요』에 수록된 「독 · 사의 찬미」와 짝을 이루는 작품이다. 두 작품 모두 그리스 동쪽 해안의 작은 섬 모넴바시아를 소재로 한다. 「독 · 사의 찬미」는 중세의 분위기를 풍기는 도시 모넴바시아를 거니는 현재와 암탉을 서리하다가 아버지에게 혼이 난 오빠의 추억을 함께 서술하는 작품이다. 여기서 시인은 중세풍의 도시라는 오래된 시간의 흔적을 매개로 유년의 추억을 거슬러 오르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모넴바시아」는 「승주우체국 계단에 앉은 문장」과 마찬가지로 시인이 돌계단을 올라 "저문 중세의 풍경들"을 카메라로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 "뺏기고 빼앗았던 " 침탈의 시간을 견디고 꽃처럼 살아남은 "섬의 역사"를 살피면서, 시인은 시간을 견디는 인간의 자세를 연역해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저 좁은 통로를 걸어오는 당신"이라는 과거가 "모두 차별 없이 저물어" 간다는 숙명을 받아들이는 태도이다. 모든 것은 과거가 된다. 서처럼, 모든 존재는 각자 삶을 견디다가 잊히고 사라진다. 그러나 그 숙명을 거스르기보다 받아들일 때, 또한 그것을 모든 존재가 함께 나아가는 공통의 지평으로 이해할 때 삶을 너그럽게 대하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p. 시 66-67/ 론 80-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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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상인』 2021-07월(02)호 <특집조명/ 신작시/ 작품론>에서

 * 이승예/ 2015년『발견』으로 등단, 시집『나이스 데이』『언제 밥이나 한번 먹어요』

 * 박동억/ 201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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