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에서 읽은 시

나의 씨드볼트/ 안희연

검지 정숙자 2022. 6. 1. 03:14

 

    나의 씨드볼트

 

    안희연

 

 

  금고를 열면

  씨앗처럼 웅크린 사람이 있다

 

  함부로 열지 말랬잖아 한번 죽었으면 됐잖아 비극도 습관이야

  그는 항상 투덜대지만

 

  번번이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에게는 같은 이야기를 매번 다르게 하는 재주가 있다

 

  그가 다녀간 후엔

  하늘이 핏빛으로 물들고

  방안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개들은 침대 밑으로 기어 들어가 시름시름 앓고

  온 벽은 이끼로 뒤덮이지만

 

  나는 그가 죽음을 말하는 방식이 좋다

  나는 이 누수를 멈추고 싶지 않다

 

  그는 귀신같이 내 눈빛을 읽는다

  누가 누굴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신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네

  너는 나의 진짜 얼굴을 본 적이 없어

 

  언제나 그는 처음 있었던 곳으로 돌아간다

  흙속에 묻히길 기다리는 씨앗의 일을 한다

 

  한 방울씩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릴 거야, 그게 너의 영원이야

  그의 마지막 인사는 십 년이 지나도 똑같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물이 새는 곳은 없다

  그래도 물이 떨어진다

      -전문-

  

    * 씨드볼트: 기후 변화, 핵전쟁 등 지구상의 여러 재난을 대비해 식물의 종자를 저장해둔 씨앗 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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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로 여는 세상』 2021-가을(79)호 <젊은 시인 초대석/ 신작시>에서

   * 안희연/ 2012년 『창비』로 등단, 시집『너의 슬픔이 끼어들 때』『밤이라고 부르는 것들 속에는』『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