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서상민
길고 흰 손
그 손가락으로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
암막의 무대 위를 날아다니다
한순간 흔적 없이 사라지는 나비처럼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우연한 나비처럼
비상에는 이유가 없고
심장에는 향방이 없네
양들의 입술 위에 얹힌 나비처럼
믿고 싶은 거짓말처럼
검은 심장에 피가 도네
가면을 쓴 마술사의 눈을 피할 수 없네
눈이 내리네
눈썹 위에 내려앉은 나비가
주르륵 눈물로 흩어지네
단 하나의 주문을 완성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마술사처럼
거짓말을 믿기 위해
날개를 다친 나비처럼
공연이 끝나고
마술사가 떠나네
흰 박수 소리 등 뒤에 파닥이네
죽은 나비들이 테이블 위에 쌓이네
-전문-
해설> 한 문장: 시집의 표제이기도 한 이 시는 언어와 사물의 관계와 같은 층위에서 현실과 환상의 세계를 탐구한다. 마술사에 의해 나타나 암막을 날아다니다 사라지는 나비를 화자는 "잘못 든 길에서 마주친/ 우연한 나비" 같다고 진술하고 있다. 우연성은 필연적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 "비상에는 이유가 없고/ 심장에는 방향이 없"다는 확고한 시적 진술도 나비의 입장에서는 우연성에서 비롯된 세계이기 때문이다. "믿고 싶은 거짓말"이란 추론컨대 마술사에 의해 결정된 우연의 세계이다. 마술사가 꺼낸 나비는 자율성을 가질 수 없는 일이지만 "양들의 입술 위에 얹힌 나비"와 같은 아름다움으로 가장된 사물에게 생명력을 부여한다는 것은 현실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미 구조된 세계에 대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일반적인 인간의 운명이다. 그러한 점에서 검은 모자에서 흰 나비를 꺼내는 "가면을 쓴 마술사"의 존재는 신의 위치에 있게 된다. 그러나 가상의 세계에 존재하는 나비는 눈이 내리면 "주르륵 눈물로 흩어지"게 된다. 어쩌면 마술의 세계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이며 우리 자신은 나비의 운명처럼 눈물로 흩어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거짓말을 믿기 위해/ 날개를 다친 나비"란 마술의 세계를 현실로 긍정하고 받아들이는 실존들을 연상케 한다. 공연이 끝나면 테이블 위에서 죽어가는 나비는 불안한 실존의 표상이라 할 수 있다. 장자가 나비의 꿈에서 보여주었듯 현실과 꿈의 경계는 모호한 것이며 우리가 사실이라고 인지하는 세계 자체는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일지도 모른다는 회의가 이 시에는 녹아 있다. (p. 시 30/ 론 130-131) (우대식/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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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 『검은 모자에서 꺼낸 흰 나비처럼』에서/ 2022. 5. 13. <문학의전당> 펴냄
* 서상민/ 경기 김포 출생, 2018년『문예바다』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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