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에서 읽은 시

계곡에 핀 꽃 외 1편/ 이숙이

검지 정숙자 2022. 5. 25. 02:13

 

    계곡에 핀 꽃

 

    이숙이

 

 

  무리무리 피고 지는 들꽃은 누구의 절규인가

  하늘 아래 걸어놓은 수만 볼트의 고압선

  삭아 바스러진 역사는 대양의 폭풍우처럼 감전당한다

  전쟁이 어떤 것인지

  죽음이 어떤 것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녹슨 물통과 부러진 숟가락

  솜털보다 보송보송한 소년병은

  기다림에 지친 흐릿한 편지지처럼 바래간다

  활짝 열어놓았던 대문짝은 떨어져 나가고

  고향집 마당가에는 목백일홍만 선혈 낭자하다

 

  볕 바른 국림묘지의 펄럭이는 깃발들

  누가 우리를 잊었는가

  누가 우리를 찾아 줄 것인가

  산 자들은 두려움에 침묵하며 상처를 봉합하고

  골골이 숨어있는

  열일곱 이름 없는 저 불발탄!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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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붉은 가시

 

 

  새벽 어스름 시골집 부엌에서 늙은 쥐를 밟아 죽였다

  죽은 쥐를 불집게로 집어 밭고랑에 내던졌다

  피 묻은 신발을 신고

  불 땐 매캐한 연기의 눈물로 된장을 끓이고

  나물을 무쳐 아침상을 차렸다

  임신 팔 개월이었다

  아랫도리는 퉁퉁 부어 먹고무신의 코가 자주 찢어졌다

  아궁이 앞에 앉아 찢어진 코를 깁고

  장닭 목을 비틀고 이 빠진 식칼로 모가지를 내리쳤다

  생고무보다 질긴 시간들이었다

  임신 팔 개월이었다

 

  흩어진 머리칼을 동여맬 틈도 없이

  산더미 같은 하루가 전신을 깔아뭉갰다

  순종이라는 믿음밖에는

  세상 아무것도 두려운 게 없었다

 

  그 시절 난 우아한 태교를 믿지 않았다

  직면을 참고 살아내는 것이 훌륭한 태교였다

  대장장이가 달군 쇠붙이를

  하루하루 모루에 놓고 두드렸다

  담금질은 모질고 독했다

  학교에서 배운 인격이나 품위 따위는

  딱딱한 거북 등껍질로 벽에 걸어두었다

  터널 반대편에서 노을이 진다

 

  낡은 족쇄를 발목에 채우고

  캄캄한 밤 마당에 엎드려 위로를 빌던 시간이었다

 

  가시나무가 아궁이에서 활활 타오른다

  굵고 붉은 가시 하나, 타지 않고 끝까지 남아있다

  서기瑞氣 짙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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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집 『붉은 가시』에서/ 2022. 5. 1. <현대시학사> 펴냄   

  * 이숙이/ 경남 고성 출생, 시집『바다로 가는 소금』『꽃들은 만개의 꿈을 반복한다』『누가 시간좀 빌려주세요』, 에세이집 『세상의 존귀하신 분들께』(공저) 등